변론을 피해라 – feat.해가 저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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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일부턴 구정 연휴가 시작된다.
난 물론 혼자, 조용히, 내일은 평안하게 몽상에 깊이 빠져들어 보려고. ㅇㅇ.
원래 변론은 악한 것이다. 그러니 변론을 피해라.
그 이유는, 변론의 그 끝이, 바로 나 자신으로 끝나기 때문이지.
예를들면, 누군가 예수 또는 창조자의 존재를 부정하여 변론을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변론의 시작은,
예수 또는 예수를 증거 한다는 명제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결국 남는건, 나, 내 자아, 내 욕망, 그리고 내 영광만 남아…
이를 우리는 변론이라 말한다.
설사 내가 성경을 증거하며 창조자의 존재를 증명했을 지라도,
그 끝은 반드시, 나, 내 자아, 내 욕망, 그리고 내 영광으로 귀결돼. 반드시.
그 끝은, 그래서 예수로 시작했을 지라도, 예수는 남아있지 않아.
사사로이, 난 이와같은 경험을 무수히 많이 했어.
예수가 이제 변론을 삼가하라고 가르쳐 준 날(이때는 내가 예수와 친했음), 그 이후로, 내겐 두 가지 경우의 수만 존재 했었어.
하나는, 내 말을 듣고자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시는 무언가 증가하지 않았고, 먼지를 툭툭 털고 그 사람을 떠났어.
하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말에 귀기울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야.
ㄴ 예를들면, 산에서 만났던 어떤 반야란 분과의 대화를 소개 했었는데 바로 그런 경우였어.
그래서 난, 인터넷의 등장을 누구보다 열열히 응원했었어.
인터넷이란 공간 안에서도, 조심해야 할 건 조심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기보단 위로가 되는 글을 쓰면 더욱 좋겠지만,
어쨌든 인터넷이란 이 공간에선,
-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
-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내가 가진 사상과 정신을,
마음놓고 할 수 있으니까.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비판적인 글을 쓸 때도 있지만,
하지만 한편으론 듣고싶지 않은 이야기는 지나쳐 가면 되고, 내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지나쳐 가면 그만 이니까.
내가 가진 사상과 정신의 반대편에 있다면 그저 먼지를 툭툭 털어버리고 스쳐 지나가면 되고,
내가 당신의 반대편에 있을 지라도, 당신도, 당신과 한 편인 인생들과 어울리면 그만 이니까.
사실은,
모든건 선택(選擇)이라는 한 가지 진실을, 내가 너무 잘 아는 이유 이기도 해.
모든건, 그저 선택(選擇)이야…
성경을 증거하는 수많은 목사라는 부류가,
인류 역사의 시작, 곧 인류 역사 최초의 거짓말 ‘창3: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바로 사단의 이 거짓말이었다고 증거하지.
- 참고) 뱀이 여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했던 첫 행위도, 변론을 청하는 일이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또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유1:9) 했던것도 기억하기 바란다. 변론에 댓구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도, 선택(選擇)이라는 걸 해.
여자는 창조자와 같아지고 싶어서 사단의 거짓말을 선택했고,
남자는 창조자와 동급이 되고 싶어서 여자를 핑계삼았어.
모든건 선택(選擇)의 문제야.
내가 인터넷이 등장했을때 열광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누군가를 책임지거나 누군가를 설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우건 좌건, 기독교건 불교건, 모든건 선택의 문제야. 잘못 알았기 때문에, 속았기 때문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選擇)의 문제야.
그냥,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거야.
그래서 인터넷의 등장이 기뻤었어.
내가 쓰고싶은 글,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 마음껏 내 마음껏 쓰고 기록 할 수 있으니까.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 쓰고싶은 이야기를 쓸 수 있기 때문에.
마5: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기어들아, 내일부터 구정 연휴지.
늘 가슴 뭉클한 삶을 살아도 돼. 남은 바라볼 필요가 없는 거야.
늘 미래를 준비하며 설레며 살아도 돼. 남은 남이고 나는 나야.
내게 주어진 시간, 내가 온전히 내 하루를 살아내면, 그러면 그 열매가 누군가에게 비치겠지.
그 열매가 누군가의 어두움을 드러낼 수도, 그래서 누군가는 그 열매를 시기하고 피하려고 들겠지.
내 말이 아니라, 내 열매야.
내게 주어진 시간, 내가 온전히 내 하루를 살아내면, 내 심장이 뭉클해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거야.
때로는 하고싶은 말 속에 거친 표현과 타인을 향한 질타 혹은 질책이 있을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살아내자.
남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남이 나를 어떻게 대우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대우했는지 돌아보면서,
내가 정말, 내 자신을 귀하게 대우했는지 살펴보면서,
또 한걸음을 걸어보자.
부디,
가슴이 뭉클하고, 뜻깊고, 기쁨에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려오는,
그래서 무엇 인가를 이루고자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소리를 느끼면서,
정말정말 따뜻한 설 명절 보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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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4. pm4:40 추가_
행15: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어떤 이는 ‘욥기를 통해서 증거된, 여호와가 욥을 향해 변론을 하자 한 그 변론은 뭔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고,
또 바울의 등장과 함께 증거된 사도행전에도 ‘변론‘이란 단어가 다수 등장하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창조자의 주권하에 있는 것이며,
창조자의 뜻에 따라 창조자 스스로, 그리고 사도들에게 허락된,
그 당시, 그 때에 허락되었던 복음을 위한 과정이었다.
본래 성경이 증거하는 정신은 그렇지 않아.
성경을 읽으며,
창조자의 입장에서 고민이란걸 해야한다.
예를들면, 위 사도행전 15장에서 왜? 바울은,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않은 마가를 데리고 갈 수 없다 했는지.
한가지로 일하지 않았을 지라도 그들(바나바, 바울, 마가, 실라)은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안디옥에 함께 있었고,
한가지로 일하지 않았을 지라도 그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왜? 뭐가 그렇게 크게 잘못되었기에?
근본적인 창조자의 질서를 훼방하는 행위는 작은 일이 아니다.
또 근본적으로 창조자가 정한 그 사역을 행함엔 그의 뜻이 있고, 그의 뜻을 보인다.
그래서 사역자들은, 그의 뜻을 쫓고, 그의 뜻을 쫓기 위해 논의를 하고, 기도를 하는것이 아닌가.
한가지로 일하지 않았다 함은, 예수가 안디옥에서 이 사역을 해라 했는데, 마가는 다른 일을 했다는 것이다…
‘변론을 피해라‘ 글(토픽)에 위와같은 내용을 추가함은,
전후좌우 상황을 모두 증거하려 하는건 아니니, 이정도로 사역, 또는 동행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부분을 기억하면 되겠다.
문제는 이런 거다.
예를들면, 예수가, A 그룹을, B 마을의, C 병원으로 보내서 그 병원에서 헌신하라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이 A 그룹 내에 D 사역자가, C 병원을 빠져나와, E 병원으로 가서 그곳에서 사역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D 사역자는, 예수를 위해 사역을 한 게 아니다.
D 사역자는, 근본적으로 창조자의 질서를 파괴했다.
D 사역자는 예수를 위해 그곳에 간 것도 아니고, 예수의 뜻을 쫓은것도 아니다. 이는 자기 영광이며, 자기 자신의 사역이다. 자기 자신의 의를 위해 그곳에 갔다는 말이다. 이는 곳 육이며, 육의 혈기며, 육의 자랑이다.
바울은 이런 영의 세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D 사역자를, 다시는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예수의 사역과 그의 질서를 깨뜨린 D 사역자를 용납할때,
그가 절대로, 혼자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반드시 사단과 함께 온다.
더 큰 사역자들이 D 사역자에 의해서 육의 자랑, 육의 안목, 육의 영광에 치우치게 될 테고,
결국 이 사역자들의 사역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영의 눈으로 봐야만 한다.
다르게 말하면, D 사역자를 용납하자 한 본문의 바나바가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바나바는 육신과 육에 얽매인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엔, 이 사실을 알았겠지^^
43기어에서, 내 글을 읽어본 기어들은 알거야.
수없이 많은 글을 통해서, 원죄에 관하여 증거 했다.
원죄란? 하와가 사단의 거짓말에 동참해 사단과 같이,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한 그 육신의 욕망이었다고.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기에 사단을 떨어졌고, 사단에게 속아 스스로 자아를 들춰낸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났다.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은, 신을 부정하게 되었고,
스스로 신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인간들은 창조자의 존재가 싫었던 것이다.
인생들은, 수없이 많은 순간순간, 매 순간마다,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다. 이게 팩트다.
만약 그 자리에, 하와가 아니라 바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바울도 하와와 같이, 뱀의 거짓말에 반응하며, 뱀의 거짓말에 귀가 솔깃 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울은 단호하게, 사단아 물러가라 했으리라.
그래서 변론은 악한 것이다.
변론이란 근본적으로, 사단의 속삭임에 반응하는 것이다.
사단의 속삭임에 반응한다는 건, 결국 사단과 연합할 준비가 되었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변론을 삼가해야 한다.
유1: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천사장 미가엘은 마귀와 다투어 변론하지 않았다.
그 대신, 창조자가 사단을 꾸짖기를 원했다…
이 증거가 미쁘다.
그러므로 변론을 삼가해라.
다만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할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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