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반란사건

포럼(Forums) 뉴스 앤 이슈 여순반란사건

  • jamnetkr
    Coins: 52,765
    2019-07-17 19:46

     

     

    여순반란 사건 계기…군대내 좌익 색출, 국회 프락치 사건…국가 보안법 제정돼

     

    AA.11954507.1

     

     

    남한내 공산주의 활동 ‘극성’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 즉 여순 반란은 갓 건국한 대한민국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습니다. 공산주의자의 만행으로, 혹은 그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사건이 대한민국을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줬습니다. 여순 반란 직후 정부가 군대 내부에 있는 공산당 세력을 뿌리 뽑는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를 ‘숙군 작업’이라고 합니다.

     

    숙군 작업이 시작되자 군대 내부에 있던 좌익 세력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공군 조종사가 비행기를 몰고, 해군이 소형 경비정을 몰고 북한으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또 춘천의 2개 대대 750명이 집단으로 월북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38선을 넘은 뒤 대대장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대대원들이 탈출을 시도해 반 이상 되돌아오기는 했지요. 하지만 북한은 이런 일을 내세워 “이승만 정권이 곧 무너질 것”이라고 선전했습니다.

     

    대한민국은 그럴수록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1949년 7월까지 이어진 숙군 작업으로 전체 군인의 10%에 달했던 좌익 세력을 모두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건전한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그 자리를 메워 군대의 결속력은 더 강해졌지요. 그 다음해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은 군대가 집단으로 투항하거나 반란을 일으켜 자기들 편에 설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숙군을 철저히 한 덕분입니다.

     

    또 여순 반란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법은 나라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변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하거나 가담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의 활동이 불법적인 일이 됐습니다.

     

    그 무렵 친일 인사라 부르는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일이 시작됐습니다. 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리고 임기 2년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했죠. 1949년 1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반민특위는 친일 경찰, 친일 변호사, 친일 작가, 친일 역사학자들을 잡아들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경찰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해방 후 3년 동안 치안을 유지하고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는데 뒤늦게 친일파로 처벌받게 됐다고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당시는 공산주의자들이 여전히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을 때였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좌익 세력이 설치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 경찰을 동요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AA.11954510.1

     

     

    공산주의자부터 막자…반민특위 활동 한계

     

    1949년 6월 경찰 간부 세 명이 반민족 행위자로 체포됐습니다. 경찰은 그들의 석방을 요구했지요. 반민특위가 이를 거부하자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습니다. 결국 국회의 결정으로 반민특위의 임기는 1년 만에 끝나고 그해 8월에 해산됐습니다. 반민특위는 1년 동안 688명의 반민족 행위자를 수사해 293명을 기소했습니다. 그중 재판이 종결된 것은 38명,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30명에 그쳤습니다. 그나마 다음해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두 풀려났습니다. 결국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처벌은 거의 못한 셈입니다.

     

    반민특위 활동과 친일파 청산이 흐지부지된 것을 평가하려면 당시 우리나라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함께 살펴야 합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여순 반란 사건이 터졌고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한 1949년 1월은 숙군 작업이 한창 이뤄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한민국 내부 깊숙이 파고든 공산주의자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였지요.

     

    또 그해 4월과 8월에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프락치’는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어떤 조직에 숨어들어 비밀리에 활동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한민국 국회에 남로당의 지령을 받는 프락치가 들어와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의 활동을 한 것입니다. 프락치 혐의로 13명의 국회의원이 체포됐는데 그중 세 명이 반민특위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하는 중대한 시기에 친일파 문제로 민족이 분열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반민특위 활동이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전선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반민특위 활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났고 친일파들은 처벌받지 않게 됐죠. 하지만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친일 부역자 선거권 박탈

     

    어떤 사람들은 북한이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해 민족 정기를 되살렸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북한은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체계적인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숙청했을 뿐이지요. 그리고 그들을 탄압하고 재산을 빼앗을 때 친일파라서, 혹은 민족의 반역자라서 숙청했다는 명분만 붙였을 뿐입니다. 반대로 공산주의에 충성한다면 친일했던 사람도 가리지 않고 데려다 높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반면 남한에서는 일본을 위해 일했던 친일 부역자에게는 5·10선거 때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주지 않았습니다.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노력이 북한보다 남한에서 더 적극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뤄졌던 것입니다.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는, 1949년 7월까지 이어진 숙군 작업으로 전체 군인의 10%에 달했던 좌익 세력을 모두 몰아낼 수 있었다고 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6.25전쟁은 그 자체로 많은 의문을 남긴 전쟁이다.

     

     

    참고) 6.25 브리핑(1950년-한국은 2018년-한국과 쌍둥이).

     

     

    위 링크는 시스템클럽 지만원 박사의 글을 고스란히 옮긴 글이다. 위 글을 읽어보면 6.25전쟁의 의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목차를 살펴보면,

     

    • 6.25의 아침.
    • 한국방송 믿다 다 죽었다(6.25당시 방송국은 빨갱이가 장악).
    • 미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 군번 1번 이형근 대장이 회고하는 6.25.
    • 일본 전사에 쓰인 영동 지역 전투와 노근리.
    • 일본이 쓴 6.25전사 요약.
    • 전교조, 강정구 등이 주장하는 6.25.

     

    이다.

     

    그 중 군번 1번의 외길 인생 이형근 회고록”(중앙일보사) 제55족-57쪽에 군수뇌부에 숨어있는 간첩을 의심하는 10대 불가사이를 다음과 같다.

     

    1. 첫째, 일선 부대의 적정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이다. 
    2. 둘째,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장급의 대대적인 교류와 이동이 단행되었다. 모두가 지형과 병사에 익숙 치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3. 셋째,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다. 6.13-6.20일에 걸친 전후방부대 이동 역시 가장 부적절한 조치였다. 
    4. 넷째, 북 6.11부터 발령됐던 비상경계령이 6.24일 0시에 해제됐다. 
    5. 다섯째, 이런 위기 상황에서 육본은 비상경계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1(50%)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다. 
    6. 여섯째, 육군 장교클럽 댄스 파티다. 장교들은 6.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다. 
    7. 일곱째, 적의 남침 직후 우리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 투입해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8. 여덟째, 적의 공세로 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6.25-27일 우리 방송은 국군이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9. 아홉째, 한강의 조기 폭파다. 병력과 군수물자가 한강 이북에 있는데도 서둘러 폭파했다. 
    10. 열번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집행이다. 최대령은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 폭파했을 뿐인데 이에 책임을 지고 1950.9.21일 비밀리에 처형됐다.

     

     

    이승만 정권은, 군 내부의 빨갱이들을 소탕하지 못했다.
    어쩌면 당시 공군 조종사가 비행기를 몰고 북으로 넘어가고, 해군이 소형 경비정을 몰고 북한으로 넘어가고, 춘천의 2개 대대 750명이 집단으로 월북하는 사건 등등등이 있었던 건, 빨갱이들의 고도의 전술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체 전체 군인의 10%에 달했다는 좌익 세력에 관해서라면, 전체 군인의 60%를 넘었었는데, 그래서 숙군 작업 조기 철패를 반대했었다는 주장도 있다.
    ㄴ ps) 지금 도저히 그 기사를 못찾겠다. 찾는데로 댓글로 남기도록 하겠다.

     

    심지어 임신부, 애기를 업은 엄마들로부터 총격을 받은 미군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때로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이 사건!
    이 사건이 바로 "노근리" 사건이다. 군 내부 뿐 아니라 빨갱이가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그 빨갱이들 역시 현재까지 남한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많은 축복을 받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빨갱이로 남한 전복을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돌고 다시 돌아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