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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3
성령을 한번 찾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머리로는 동행을 말했지만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느낌을 가진 것 같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함이 한번만 구함이 아니고 찾음이 한번만 찾음이 아니고 두드림이 한번만 두드림이 아니라는 느낌이 스쳤다.
동행이란 구함의 연속이고 찾음의 연속이며 두드림의 연속이란 느낌이 들었다.
거듭남이란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동행도 순간도 아닌 지속임을 생각했다.
기도도 매달림도 마찬가지...끊임없이.. 이어지는...마치 호흡처럼.. 그렇게 되어짐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즉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린 그 심정을 느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어져야 함을 느낀다.
성경 말씀에 첫사랑을 잃어버림이란 그 더 이상 두드리지 않음이고 더 이상 찾지 않음이고 더 이상 구하지 않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스친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음을 느끼면서 그것에 동요되어 어느새 스스로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우를 범하고 했음을 느낀다.
이미 예전에 느낀 것을 망각하고 전능하신 그분을 제한하여 그것에서 내가 느끼는 연민 애처로움을 사랑으로 포장하고 싶어했음을 느낀다.
얼마 전에 쓴 글에서 그것을 하지 말아라고 하였음에도..내가 도리어 그것을 행함이라...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원해서 생긴 것인데...하나님이 뜻하시기에 생긴 것인데....
그래서 얼마나 절절하신지....십자가의 사건과 이 세상에 있는 고통스런 상황이 역으로 그 절절함을 증거한다고 느낀다.
다만 그것이 나에게 와닿지 않기에..내 마음을 울리지 못하기에...그저 스치는 뭉클함에 그치고 스치는 감정놀음에 그치기에.
어느새 그것을 스스로 와닿게 하고자 앞서가는 죄악을 범하고자 하였음을 느낀다.
기다려야 하는데 주시기를 .....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 도리어 내가 앞서가고자 함음 느끼게 하셨음에..
다시 한번 나를 돌이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더욱 하나님의 얼굴만을 앞서가지 않고 구하기를 애쓰야 함을 느낀다.
에덴시절의 회복을 생각하다
에덴시절하고 똑같으면 또 뱀에게 속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지금의 구원의 과정은
반드시 회개가 포함되기에 육을 부인하게 됨 즉 육을 미워함이 추가되지 않냐는 것이다.
에덴시절의 회복이지만 업글?된 상태이지 않냐 싶었다.
마음이 무겁다.
교만한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하나였었다는 것이 와닿게 느껴지면서 내가 하나님이다란 생각을 스며들게 한다고 할까..
머럴까 알면 안되는 걸 안 기분..
신성모독하는 느낌....
예수님을 우습게 여기는 기분을 들게 함이 느껴져서 두렵다..이런 교만한 마음이 느껴짐이. .
예수님에게 매달림을 방해한다 싶기에
이것 역시 예수님 당신의 뜻 아래 생긴일 당신에게 다가서는 것이 되길..바래본다.
성자로 유명한게 축복일까
어떤 목사 있다 치자 이 목사의 초인적인 헌신으로 세상에서 성자로 칭송받는다 치자..
그 목사가 죽으라면 죽는다는 교인이 다수 았을 정도라고 치자.
이게 옳은가.. 그 목사는 교인들에게 자신을 바라보지 말며 예수님을 바라며 강조함이 옳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죄악이라며 교인을 경계시켜야한다고 느낀다.
현대 교회라는 시스템이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는 형태다 싶음을 다시금 느꼈다.
요나에 대한 몇가지 생각이 들었다.
요나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온전치 못한 부분을 하나님이 요나에게 느끼게 하려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자기부인이 되지 않는 부분을 니느웨에 회개 선포하라는 말로 알게 하심이라 느껴진다.
요나를 위해서 주신 은혜로 느껴졌다.요나가 회개할 부분을 알게 하심이기에..그리고 회개의 자리로 이끌고 있다고 느끼기에...
예수님의 질서대로 창조된 세상이기에 창조 질서 자체를 만약 어쩌고 하는 것 자체가 사단의 생각이라 들었기 때문이다.
창조 질서 자체에 대해서 왈가불가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 느낀 것이다.
살인과 간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그 생각이 정하셨으니 우리는 그것에 따르면 되는 것이다..그것에 어떤 내 생각을 추가하는 것이 사단의 마음이라 생각들었다...
예수님이 정하심과 정하신 내용을 아는 것이면 충분하고 그것에 논함 자체가 이미 피조물의 위치를 벗어난 행위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악이라고 하기에 동성애는 악이다...그러나 예수님이 동성애가 악이 아니라 하는 하면 등등 이것을 넘어선 생각 자체가 사단적 사고라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동성애를 예수님이 악으로 정하시고 그에 따른 열매도 그에 합당하게 맺으시는데... 그 동성애를 악으로 정하시지 않으면 이란 가정함 자체가 이미 피조물의 입장을 벗어난 생각이라는 것이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자녀를 몰렉의 불에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케 한 것은 나의 명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
사람은 선택이 존재하는 피조물임을 느꼈다.. 하나님 말씀을 어길 수 도 지킬 수 있는 선택이 나타날 수 있는 피조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아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는 지킬 수 없는 피조물...
은혜를 받지 않으면 말씀을 어길 수 밖에 없는 존재...그게 사람이다를 느낀다.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어 구원하고자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결국 바라시는 바는 구원이시며 그 구원의 과정에 악인은 악인대로 쓰임받고 의인은 의인대로 쓰임받음이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이젠 이렇게 들린다..원수로 말미암아 은혜받음이 있음이라고
어떤이가 악인으로 쓰임받음에 어떤이가 의인으로 쓰임받음이 있음이라고
그가 악인으로 쓰임받음에 너가 의인으로 쓰임받을 수 있음이라고..
그래서 악인으로 쓰이는 그가 의인으로 쓰임받기를 기도함이 옳음이라 느낀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자녀를 몰렉의 불에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케 한 것은 나의 명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다만 병주고 약주는 그것이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이기에.. 그 결국 은 약을 주시기 위함이라...병주는 것이 그분의 뜻의 전부가 아니라 생각한다.
지키지 못함을 아시지만 율법과 선지자로 말씀하심은 어떤 심정일까 싶다...하나님이시기에 도리어 슬프고 괴로운 분이라는 느낌마져도 든다... 하나님의 자리는 과연 행복한 자리인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중심에 있는 그 마음을 느끼게 해주시길 바래본다...얼마나 가슴아프고 절절한 마음이신지..얼머나 사람을 절절하게 바라보시는지...
덧붙이는 글
스치는 생각은 스치는 생각으로 두고자 한다...뿌린대로 거둔다는 느껴진 질서조차도 끝이 없게 깊은데..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생각함이 어리석다 싶었다...뿌린대로 거둔다가 그것을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아는 것의 전제이기에..
주어진 것을 감당해 가는 것이 우선이라... 그러니 그 이상을 생각함은 뿌린대로 거둠을 담은 이후가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다만 하나님을 내 생각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함을 느꼈다...느껴진 것은 부분이다를 마음에 새겨야 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기에...그분은 자체를 피조물은 온전히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음을....느낀다.왜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기에 ..
그분이 스스로 계신 분이기에 그분에 대해서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모를 수가 없음을 느낀다. 왜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기에...
아울러 그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자신 안에서 드러내셨고 그 형상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육신으로 형상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셨고 자신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셨으며 아버지는 자신보다 크시다 하시며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자신 안에 계시다고 하셨다.
이 모든게 그분이 스스로 계신 분이기에 저리 표현함을 이제는 느낀다.. 나를 기준으로 사람을 기준으로 그분을 생각했기에..
왜 그 자신을 아들이라고 표현하지 왜 아버지 따로 아들 따로 표현하지...의문을 가지고 걸림이 있었다.
그런데 도리어 저 표현이야 말로 자신이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같은 의미 다른 표현임을 느낀다.
나를 기준으로 저 기준을 보았기에 걸렸던 저 표현이 오히려 아들과 아버지로 하나이신 스스로 계신 분이시구나를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아들이라 표현하심이 오히려 그분이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심을 느끼게 되었다.
성경의 표현이 걸린다..내가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