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타임테이블 –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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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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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작성을 시작하며 다음 두 가지를 꼭 기억하면 좋겠다.

    하나는 누가 뭐래도,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창조자와 나와의 "1대 1"의 관계라는 것이다.

    창조자와 아담이 1대 1의 관계였듯, 창조자와 아브라함이 1대 1의 관계였듯,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1대 1의 관계다.

    창조자와 우리 또는 무리(그룹)라는 1대 2의 관계는 기독교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성경은, 주인공은 예수고, 예수의 인류를 향한 구원사역의 역사서다. 이게 성경이다.

    이런 성경은, 실질적인 역사서며, 문자 그대로 일어났고 이루어진 살아있는 인류의 역사다.

    처음과 끝이 있으므로, 처음이 있었듯 그 끝이 있는 종교가 기독교다. 기독교는 막연하지 않다.

     

     

    기독교의 본질적 관계가,

    창조자와 나와의 1대 1의 관계라면,

    그러면 예수의 타임테이블을 두 개의 맥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예수의 구원사역의 처음과 끝이라는 인류역사를 비취는 타임테이블이고,

    다른 하나는, 본질적 구원사역을 위한, 1대 1의 관계 속에서의 타임테이블이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의 탄생은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와야 한다.

    왜냐하면 약속을 맺은 대상이고, 그 약속을 믿는 믿음 때문에 성령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1대 1의 관계 속에서의 타임테이블에 초점을 맞춰 작성하려고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타임테이블.

     

    갈3: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에 관한 성경의 증거가 많지만,

    그 중 갈라디아서를 통해 증거한 복음이야말로 믿음의 조상이 어떤 의미인지 본질적으로 접근하게 해 주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

     

    본래 복음이란? "약속(約束)"이다.

    이 "약속(約束)"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와 맺은 언약인데, 창조자가 직접 이 땅에 오겠다는 약속이었다. 창조자가 직접 이 땅에 떨어져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 첫열매가 되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로 인하여 창조자의 영인 성령을 주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할 수 없는것을 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우리는 복음이라 말한다.

     

    구원이란 동행(同行)이다.

    모세를 통해 증거한 바, 너희는 오로지 너희 주의 얼굴만 구해라 하였다.

    모세를 통해 이 증거를 가르친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증거한 복음은, 너희는 그저 내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한가지 진리였다. 매달려 있어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매달려서 예수가 어디로 가든 동행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구원"이라 말한다.

     

    요15: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구원이란 본질적으로 성령을 주겠다 한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에게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매달려서 동행하는 것이니까.

    그가 어디로 가든, 그에게 매달려 동행하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든,

    은혜를 주든 안주든, 은사를 주든 안주든,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데려가든, 천국으로 데려가든,

    그런것과 아무 상관없는, 그저 매달려서 영원히 동행하는 것이다.

     

     

     

     

    히브리 기자를 통해서 증거한 바,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신뢰(信賴)라고 하였다.

    신뢰(信賴)는 주권자가 창조자라는, 창조자가 모든걸 주관한다는, 절대적인 의지(依支)다.

     

    그러므로 내가 확신하는 바,

    믿음을 논하는 자는 복음을 믿는 자며,

    복음을 믿는 자는 성령을 의지하는 자며,

    성령을 의지한다 함은, 곧 예수에게 매달려 있으려 하는 자다.

    복음믿음구원은 땔래야 땔 수 없는 하나의 고리다.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복음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생들이 예수와 동행했을까.

     

    수없이 많은 인생들이 예수에게 매달려 오늘날까지 동행하고 있겠지.

    더러는 먼저 육신을 벗어던진 인생들도 있을테고, 때문에 우리 눈엔 보이지 않는 인생들도 존재한다.

    육신을 벗어던진 인생들이라 함은 먼저 죽은 영혼들을 말하며, 우리 눈엔 보이지 않는 인생들이란 우린 아직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원이, 예수에게 매달려 예수와 동행하는 것이기에 먼저 간 이나 나중에 갈 이나 차이가 없다.

     

    어떤 이는 복음이 오기전 창조자를 경외하는 양심에 따라 동행한 이도 있을테고, 그 때에 이 땅에 와서 살다 간 것 뿐이다.

    어떤 이는 예수가 이 땅에 온 그때에 복음과 함께 이 땅에 와 살다 간 인생들도 있을테고,

    그리고 우리는 이 세대에 이 땅에 왔을 뿐이다.

     

    그들이 어떻게 예수에게 매달려서 어떻게 동행했을까. 생각해 보자. 기록된 바라.

     

    요21: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예수에게 매달려 동행하던 아브라함이, 사람을 위하여 잠시 예수에게서 떨어져 세상으로 갔겠나.

    그와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를 통해 동행이 무엇인지 알게 된 베드로가, 필요하면 예수에게서 떨어져 혼자 길을 걸었겠나. 그러면 동행이 깨지는 거다. 동행이 깨어졌다면 구원도 없다.

    눈물로 호소하던 예레미야가, 동족을 향한 육신의 연민 때문에, 예수와 떨어져 동행을 멈췄나.

    이스라엘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었던 모세가 예수에게서 떨어져 이스라엘의 편에 섰었나.

    동행은 근본적으로 그런게 아니다.

    분별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국가와 민족을 향한 애달픈 마음이 들때면 "잠시" 예수와 떨어져 세상에 속해도 되는게 아니다.

    동행은 근본적으로 그런게 아니다.

     

     

    성경의 역사속에서,

    예수의 타임테이블의 기준은 언제나 이방인 때문이었다.

     

    창15: 16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방인의 죄악이 관영치 않은 이유로,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이 장사된지 사대만에 가나안으로 들어갔고,

    성경이 증거한 바,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야 예수가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그날과, 유대인이 예수가 메시야임을 알게 되는 그날은 같은 날이다(마23: 39).

     

    어떤 이는 살아생전 예수가 다시 오길 갈망하며 땅 끝 까지 복음이 전해지 길 애썼으나 먼저 간 이도 있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살아생전 예수가 다시 오길 바라 봤지만, 그들은 그렇게 예수와 동행하다 그 세대를 지나갔다.

     

    앞서간 모두가, 그 때에 따라, 때에 맞게, 예수에게 매달려 동행할 수 있는 길로만, 예수는 인도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예수의 타임테이블이란, 근본적으로 "너"라는 단 한명의 자기 백성을 향한 계획이다.

    1대 2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더하랴. 무수히 많은 증거들이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

    이스라엘이란 그 국가를 보면서도, 아 때가 정말 다 되었구나 느끼지 않나.

    성경의 예언들이 모두 이루어졌고, 남은 예언들도 모두 이루어지리라.

    세상이 손가락질하던 성경의 단 하나의 유적도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게 예수는 보존했고,

    오늘날 다윗성이 발견되어 복원되고 있다.

     

    나라와 나라가,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는 이 세대를 보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하냐.

    감추어진 모든 비밀들이 들추어지는 이 세대를 살면서 너는 무엇을 바라보냐.

     

    그러나 동행은, 이 모든걸 초월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구원사역, 곧 그의 타임테이블은, 세상이 아니라 ""라는,

    단 한명의 자기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너"라는,

    그 단 한명의 자기 백성에게 창조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게 창조자의 타임테이블이다.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든, 계시록의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든, 그런게 예수의 근본적인 타임테이블이 아니다.

    계시록의 예언을 어떻게 지켜볼건데? 그날엔, 예수에게서 떨어져 세상 사람들과 함께 우왕좌왕할거냐.

    동행이란, 곧 구원이란, 근본적으로 그런게 아니야.

     

    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되는 그 광경이라 할 지라도, 예수에게 매달려 예수와 동행하면서, 그가 보여주는데로 보면 돼. 이게 동행이야.

    사단에게 허락한 세상을 살면서, 사단에게 허락한 일을, 사단이 저지른다 할 지라도, 예수에게 매달려 예수와 동행하면서, 그가 보여주는데로 보면 돼. 이게 동행이야.

    성경이 증거한 위대한 선인들이 그랬듯이, 그 세상이 본질적으로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넌 그저 매달려서 따라가면 돼...

    이게, 동행이고, 이게 구원이다.

    예수의 타임테이블은, 근본적으로 예수와 너 1대 1의 관계에 속한, 정해진 시간이기 때문이다.

     

     

    학교엘 가려고 이른 아침 버스를 타고 가면서...

    너의 영혼이 예수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눈을 감고 한번 느껴봐.

    늘, 너보다 앞서서 그 버스에 타있는 예수를, 늘, 너보다 먼저 너의 앞에서 가며 널 지켜보고 있는 예수를...

    "너"라는 한 사람을 향한, 예수가 정해놓은 타임테이블이 있음을...

    한번 느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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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ne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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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14:36

    그래서 하는 말이야. 이 바보야...

    열방이 국가가 나뉘어졌고, 열조를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난 이상,

    국가의 미래와 장례를 고민하지 않는 인생이 누가 있으랴.

    내 나라, 나의 조국을 향해 애달파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으랴.

    가짜들 제외하고...

     

    어떤이는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에 나간걸 자랑으로 여기고,

    어떤이는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의 시간을 자랑하기도 한다.

     

    살아보니 말이다 정말 힘든 사람은, 힘들다는 그 말이, 입밖으로 절대 내뱉지 못한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그나마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에 나갈수 있는 너는, 그나마 그럴수 있는 환경에 있는거야.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마음을 누가 알랴.

    누구의 심정이 더 애달파 하는 것이라고 누가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겠나.

    잣대는, 시험이 닦친 후에 해도 늦지 않아...

     

    그래서 한 말들이었다.

    할 수 있거든, 움직이지 말아라.

     

    사단이 강하게 붙잡고 있는,

    온 세상을, 단 한명도 예외없이, 특별히 정치판에 뛰어든 그 인생들을,

    너는 어떻게 바라볼거냐.

     

    만약 그중에, 누구 하나가, 예수의 부름을 받고, 목숨을 걸고 사명을 다하려고 뛰어 들었다면,

    그러면 최소한, 그 열매를 보고,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아.

    그 움직임조차 너가 스스로 하는게 아니라.

     

    만약, 만약에 말이다...

    아무런 열매도 없이, 어떠한 열매의 증거도 분별하지 못한채,

    그가 사단에게 부름받은 자인데 그의 편에 선다면,

    너는 사단의 것이라.

     

    그래서 한 말이었다...

    나는 아프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나를 판단할 이도, 너를 판단할 이도, 판단자가 하나라.

    그러므로 할 수 있거든 움직이지 말아라.

     

    움직이고 싶거든,

    최소한의 열매를 본 후에 움직여도,

    그래도 늦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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