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맥 – 앞서가지 말자
포럼(Forums) › 바이블코드 › 성경의 맥 – 앞서가지 말자
-
성경의 맥.
성경은, 성경의 맥이있고, 성경의 맥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창2: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알고있니.
본래 창조자가 사람을 지었던 그때, 곧 창조자의 원대한 구원사역이 시작된 그때,
사람은 그 창조자의 그늘안에 머무르며, 창조자와 동행하며 인류의 역사도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그런데 먼저 하와가, 그리고 아담이, 뱀의 거짓말에 반응하면서 쓰러졌고,
그들은 결국, 창조자가 창설한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동행이 깨어진 거야...
Q) 왜 예수는, 자신의 구원사역을 이렇게 시작을 했을까. 예수는 왜? 굳이? 에덴을 증거했으며, 에덴을 통해서 무엇을? 알려주려 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예수의 구원사역이란,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 머물게 했듯, 동행이었다.
이미 창세기 2장 8절에서 에덴을 창설하고 자신이 지은 사람을 그곳에 머물게 한 증거로,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사람이, 자신에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한 것이다.
이 창조자와의 동행이 바로 구원이기 때문이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아담과 하와가 뱀의 간교에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그 후의 성경은, 없었다. 왜냐하면 창조자와의 동행이, 이어지고 있었을테니까.
그런데 본질적으로 이 세상의 권세는 사단에게 주었고,
예수의 구원사역이란, 이런 사단에게 내어준 세상속에서, 자기 백성과 동행하는 것이다.
폭풍우가 몰아칠지라도, 죽음의 골자기를 걸을 지라도,
그에게 매달려, 그와 동행하는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하나가 되어 영원히 동행하기 위한 원대한 사역.
이게 바로 예수의 구원사역이니까.
예수의 구원사역은, 이 땅에 국한된 게 아니었기에,
처음부터 사단에게 공중권세를 준 이 세상에서 완전한 건 없게 창조했던 것이다.
창조자가 창설한 그 에덴에도, 뱀이 출연하지 않았나.
- 에덴 > 율법 > 성령을 준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알게하기 위한 증거였다.
벧후3: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더 냉정하게,
본질직으로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상, 이 모든 만물은,
창조자의 말 한마디! 지탱해! 라는 그 말 한마디로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날 그 창조자가 말하길, 없어져! 하면, 이 세상은 그냥 사라진다.
하늘이 큰 소리를 내며 없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져 녹아 없어지듯, 땅도 그냥 사라진다(벧후3: 10).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이런 것이다.
그러니 과학이 말하는 빅뱅이론이 틀린말이 아니지.
과학은 언제나 성경을 증명하는 도구였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지나간 후엔, 영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음이라.
무엇을 말하나.
처음부터, 창세기의 그 시작부터, 그 후 율법을 더해 준 그 때로 이어지며,
오직 완전하게 예수에게 매달려 그와 동행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약속" 하나를 위해,
달려온 것이고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롬5: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에덴도 완전하지 못했고, 율법도 완전하지 못했지만, 완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자신의 영을 주는 방법밖엔 없었던 거야...
자신의 영, 곧 성령이 아니면,
내 안에서 내게 예수의 심정을, 창조자의 마음을, 알게 해 줄 방법이 없었던 거야.
그 완전한 동행을 위해, 창세 전부터, 창조자는 육신의 몸을 이끌고 와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계획해 놓았었던 거다.
자신의 영인 성령을 주려고...
엡1: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인간으로썬 불가능한 일이지.
왜냐하면 인간은, 타인에게 자신의 영을 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인간으로썬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최소한 우리의 머리는 생각할 수 있다.
내 영이, 내 육신과 분리가 되려면, 그러면 이 육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런 성경의 맥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게 성경을 관통하는 맥이며, 이게 모든 성경을 관통하는 본질적인 핵심이다.
어째서 성경을 "창세기, 사복음서, 사도행전"을 기준으로 삼고 읽어야 한다는 거냐.
이 "창세기, 사복음서, 사도행전"이 그 완전한 동행을 위한 본질을, 약속을, 약속의 이행을,
그리고 자신의 영인 성령을 보내준 증거, 곧 모든 성경을 관통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기준이 예수의 십자가와 약속한 성령이 되어야 한다는 거냐.
이런 성경의 맥을 모르면, 성경 전체를 자의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앞서가선 안되는 이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2: 17)?
그러면 율법은 패하여 지지 않았고, 성령은 올 필요가 없었다.
누가, 행하게 해 준다는 거냐.
성경을 읽으며, 그 성경을 마음에 세기고 교훈으로 삼아, 내 육신이 할 수 없는걸,
예수에게 매달려 동행하며,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를 바라봐야 한다.
그에게 매달려 그를 바라보는 것과, 기준이 행위가 되게 하는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런데 성경 자체의 맥을 모르면, 성경이 전하는 정신을 훼손하게 되고,
성령이 아닌 육신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이런 근본적인 죄악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맥을 알아야 함은, 성경의 근본적인 정신이기 때문이며,
기준이 내가 아니라, 내 행위가 아니라, 그에게 매달려 그와 동행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런 근본적인 질서는, 절대로 훼방해선 안된다.
한번 되짚어보자.
하와는 무엇을 하다가 범죄했나.
예수와 같아질 수 있으리란 자기기만에 빠졌고,
이는 예수에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창조자와 나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려 한 행위다.
창조자와 같아질 수 있다라는 그 기만은, 곧 창조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게 문제라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창조자인척 하는 그 행위는, 곧 나는, 창조자가 필요치 않다는 고백이라.
바울을 통해 증거된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는 율법을 행했던 육신안에 '선한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백한 바울의 고백을 확인할 수 있다.
사울은 창조자를 앞서 가려다 저주를 받았고, 반면 다윗은 늘 창조자의 얼굴을 구했고 창조자에게 매달려 있었다.
아브라함은 창조자와 언약(약속)을 맺을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쪼개진 고기 사이는 창조자가 홀로 통과했다.
그 약속 마저도, 창조자 홀로 행했다는 것이다...
어떤 성경의 증거도, 어떤 믿음의 인물들도, 스스로, 창조자를 앞서 간 인물은 존재하지 않아.
나 역시,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며,
나 역시, 로마서 11장을 깨닭은 많은 교회들이 반갑다.
하지만 절대로 앞서가선 안된다.
뭘 할 줄 모르겠거든, 그저 예수에게 매달려 있으면 된다.
하지만 그들은, 굳세지 못했고, 뭘 할 줄 몰랐던 그 때에, 결국 율법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자랑하는 유대인을 조용히 교회로 끓어들여 율법을 전했고,
더 많은 교회들이, 그 율법을 전하는 소리에 귀기울이게 했다.
이게 저주라... 이 "저주"가 내가 하는 말이냐. 기록된 바라.
갈1: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그런데도 두려움이 없다...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이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전하던 유대인들을 성경은 하와를 쓰러뜨린 뱀이며, 사단이라 증거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갈라디아서의 포문을, 성령은 위와같이 증거하며 시작한 것이다.
왜?
율법을 전하는 그 행위는 육의 것이며,
이는 성령을 주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를 조롱함이라.
이는 곧 성령을 준 그 은혜를 헛것으로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유대인이 그리스도보다 높냐. 그럴수 없도다.
그 유대인의 회복을 깨닫게 한 그가 성령일진데, 어떻게 성령을 조롱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 유대인이, 그 율법이, 히브리어가, 너희를 구원하지 못하리라.
유대인을 품고 싶으면 품어라. 그 유대인을 향해 헌신하고 싶으면 헌신을 하면 된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지...
왜냐하면, 앞다투어 유대의 땅에서 사역하는 그들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고 싶으니까.
예수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의를 들어내기 위함이라.
마7: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절대로 앞서가선 안된다.
매달려 동행하는 자가 어떻게 앞서갈 수 있다는 말이냐.
너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로지 그 열매가 너희를 증거 하는줄 모르냐.
생각을 해봐...
위 사진은 사과나무다...
나무는 뿌리가 있고, 뿌리에서 나무가, 나무에서 가지가 자란다.
그리고 나무에서 뻗어나와 자란 그 가지에, 열매가 매달리지...
그런데 만약, 탐스러운 열매가 매달린 그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그러면 그 가지에 매달려 있던 열매는 어떻게 될까?
썩어지겠지...
요15: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게 전부야...
이게 모든 성경의 정신이다...
매달려 있는 자가, 어떻게 앞서갈 수 있다는 말이냐.
그건 이미, 매달려 있는게 아니라.
열정이 생기거든, 그 열정을 예수에게 물어봐. 예수에게 물어보려면 그에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
유대인을 품고 싶으면 예수에게 고백하면 된다. 다만 동행이 깨어져선 안된다는 말이라.
그러면 예수가, 그 열정이, 육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해줘...
그러므로 인생들아...
그 육신에서 나오는 열정과 성령의 간섭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이단에 빠지는 자들이, 모든 쓰러지는 자들이, 이를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쓰러졌다.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어떤 열정을 보였냐...
그는 물 한모금도,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마시지 않았단다...
생각의 전환, 생각의 기준.
고전2: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내가 확신하는 바,
성령이 인생들을 향해 가장 기뻐하는 순간은, 인생들이 그들의 진짜 아버지, 그 창조자, 그 예수란 이름을 찾는 그 순간이라...
인생들이 그 예수를 찾을때, 그의 성령이, 예수의 생각을, 마음을, 뜻을 알게 해 줘...
그 성령이 아니면, 누구라도 예수를 알래야 알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이 그 예수를 찾고, 그 예수에게 매달려 있으려 할 때에,
반드시 그에게 매달려 있을수 있게, 도와! 반드시!
이는 곧 예수의 뜻이기도 하며, 예수의 원함이라.
눅11: 11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입으로 말고... 가슴으로...
한번 생각을 바꿔봐. 모든 생각의 기준을, 예수에게서 시작해봐...
예수에게 물어봐.
이 글을 읽는 기어들의 마음에 열정이 생긴다면, 욕망이 생기고, 계획이 생길때,
그 열정, 그 욕망, 그 계획을, 예수에게 매달려서, 예수에게 물어봐.
그 열정, 그 욕망, 그 계획이 생길지라도, 앞서가지 말고, 매달려서...
그러면 너희의 창조자가,
그 열정을, 그 계획을, 그 욕망을,
때로는 꾸짖고, 때로는 어루만지고, 때로는 자기 심정을 알게하고, 때로는 자기 뜻을 보여줘.
그 결국은, 너희가 꿈꿔보지 못했을 지라도, 더 낳은 길이야...
그에게., 매달려 있어야 돼...
기억해야 한다.
예수를 앞서가려는 그 행위는, 스스로 내 자신이 신이라 말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는 곧 율법에 속하려 하는 육의 행위며, 은혜에서 떨어뜨리려 하는 본질적인 사단의 뜻이라.
하와가 뱀에게 쓰러진 근본적 이유며,
사울이 저주를 받은 본질적 근거며,
성경의 정신을 가로막는 우를 범하는 것임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할 수 있거든,
혹 이 글을 읽는 기어들중 그리스도인이라면,
혹 앞서가려 하는 마음이 있다면,
돌이켜라...
---
아... 남에게 말할것도 없이, 나는 진짜 안 되나봐...
사는 내내, 내가 뜻한바, 내가 계획한데로, 되는 법이 없다...
원래 이 글의 제목을 "앞서가는 죄악"이라고 붙히려 했는데,
도무지 글을 써지질 않아...
무슨 뜻인지, 글을 써놓고 내가 읽으면, 알아들을수가 없네...
그래서 제목을 바꿨다...ㅜㅜ
ㄷㄷ... 그런데 이게 본질이잖아요....
앞서가는 죄악이 무엇인지 ..논하고자 하는 순간 본질에게 벗어나는 것이니..
저도 오늘 설교영상보다가 유물론에 대한 설명을 하는 부분에서 순간 섬찟 하더라구요.
유물론이 솔깃한 느낌 그래서 변론을 하려는 마음이 보이더라구요.. 그냥 예수님 믿게 해주세요라고 얼굴을 떠올렸리고 넘겼네요. 유물론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변론하는 순간 사단이 파고들거다 싶더라구요.
본질은 예수님이고 그분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신뢰하는 것..그것의 맥에서 벗어나는 것은 알 필요도 또 안다고 해도 굳이 관심 가질 필요가 없더구요.
아니 관심이 가져지는 순간 사단에 걸리는 것이라 생각드네요.논하는 내용이 중요하게 아니라 내 마음을 초점을 흘리는게 사단의 본질이니..곁가지가 아니라 사단의 의도를 보아야 겠다 싶더라구요.
크~
앞서가는 죄악이 무엇인지 논하고자 함은., 아니랍니다.
변론은 피해야 하는 것이고, 변론은 사단의 선택(방법)이죠^^
나는 내가 가진 사상을 글로 남길 뿐이랍니다.
각자의 그릇데로 받으면 됩니다.
또는.,
누군가의 말이, 그가 가진 사상을 이처럼 글로 남길때,
그 말이, 그 사상이, 성경을 근거로 한다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성경이 증거 된 것이고,
그래서 또한 모든 강론이 허락된 것이고,
그 성경과 강론을 통해서 예수를 발견할 수 있는거죠.
ㄴ ps) 내가 강론자란 말은 아닙니다^^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증거는 이 때문이랍니다.
문제는, 그 모든것, 예를들면 누군가의 설교를 듣는다거나, 누군가의 글을 읽을때,
예수를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형님 제가 가진 큰 고정관념이 ..
동행=성자같은 삶 인거 같아요.
설교를 보아도 성경을 보아도…
성자같은 삶을 살아야 동행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오고 그래요.
내가 가만히 있는게 죄인같고..그런 느낌요. 사단이 주는 생각이겠죠.
광명천사처럼 온다는 것…동행이 아닌 열정으로 성자같은 삶을 강박하는 것도 사단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게 참 어렵겠다 싶어요.
여기에 많은 이들이 현혹되겠고 저도 현혹되었구나 싶네요.
창녀와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것 처럼.. 깡패들이 목사보다 하나님 나라에 가까울수 도 있겠다 싶군요.
저는...
성자같은 삶을 살고싶다는 욕심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육에 속하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성자같은 삶을 원하는 것 아닌지 분별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어쩌면 ktj님 말하는 성자같은 삶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사람에게 그렇게 보여졌으면 하는 마음 일 수도 있답니다.
이런 부분 때문에, 내 자신을 돌아봐야 하고,
이런 부분 때문에, 예수에게 매달려 있어야 해요^^
롬3: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성자같은 삶이란,
본질적으로 내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게 성자같은 삶인지.
판단은 예수가 해요.
우리 눈에는 A라는 사람이 성자같은데,
예수는 그 A라는 사람을 가증하다 여길수 있다는 거랍니다.
그러니 성자같은 삶을 살고 싶을 지라도...
예수에게 매달려서, 그렇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보아요.
이 기도 까지랍니다...
그 성자같은 삶이,
예수를 향한, 예수를 위한, 예수와 동행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그러면 예수가 그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해 줄 거예요...
반대로 그 성자같은 삶을 바라는 마음이 육에 속한,
한낯 ktj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바램이라면,
그러면 예수가 그 마음을 다스릴 거예요...
그러니 여전히.,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든.,
예수에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한가지 진실과 바꿀수 없답니다.
성자같은 삶도,
그 어떤 삶도,
예수에게 매달려 있는 삶과 바꿀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답변 한가지만 더 추가합니다...
누구나 다 그럴수 있어요^^
누구나 다., 예를들면, 내가 이제 창조자를 알았는데, 내가 과연 가만히 있어야 할까?
이런게 바로, 열정이지요. 열정이 생기기 마련이랍니다.
하지만,
홀로 걸어가면 안되요...
열정이 생기면 생길수록...
그런 마음들이 드는 그 시기...
이 시간들이 지나갈 것이랍니다...
네에^^
들었어요^^
많은 기어들이 공유하면 좋겠네요^^
ps) 가끔... 어떤 유뷰트 영상은., 주소를 복사해서 붙혀넣어도., 영상은 뜨지 않는 유튜브 영상들이 있더라구요^^ 시간이 지나면, 난중에 바껴요^^
그러니 지금처럼^^ "복사 > 붙혀넣기" 하면 됩니다^^
파이팅~!!!
You must be logged in to reply to this t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