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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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ne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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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9 15:12

    아브라함

     

    기독교란, 기독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관계”다.

    창조자와 나와의 1대 1의 관계다.

    그래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창조자와 나와의 1대 1의 관계가 맺어지면, 그러면 그 창조자와 "동행"을 하게 된다.

    이 동행을 우리는 "구원"이라 말한다.

     

    사복음서는 분명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수를 바라보는 각각의 다른 관점으로 증거되었다.

     

    사복음서

    <출처 kcm>

     

    Ps) 이러한 사복음서의 관점이 정리된 정보는, 위 kcm이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쉽게 취할수 있는 정보니, 좀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구글링을 해보자.

     

    중요한 건,

    이러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각기 다른 관점에서 예수가 증거되었음으로,

    동시에 사복음서 전체를 아우리며 성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들면,

    약속의 관점에서 예수를 증거한 마태복음은, "마7: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증거되었다.

    이와 동일한 구절인 인자의 관점에서 예수를 증거한 누가복음을 통해선 "눅11: 11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라고 증거되었다.

    따라서 기도를 통해 구해야 할 한가지는 "성령"임을 확신한다.

     

     

    왜 성령을 구해야 하나.

    첫째. 이는 근본적인 약속이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

     

    갈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본래 아브라함과 한 약속은, 자신의 영인 성령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성령을 주기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첫열매가 된 것이다.

     

     

    왜 성령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을까.

    둘째. 성령이 아니면 예수를 알래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

     

    고전2: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따라서 성령이 우리에게 예수의 심정을, 그의 사랑을, 그의 뜻을 알게 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예수를 알 수 없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예수를 알래야 알 수도 없고, 성령이 아니면, 예수의 뜻을 알래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1장이 증거한 창세 전부터 정해놓은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의 비밀과 그 이름에 담겨 있는 원대한 구원을 위한 계획이 이것이었다.

    사람이 육으로는 할 수 없는 것, 육신의 행위로는 이룰수 없는 것을 알았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육신이 할 수 없는 걸, 성령의 간섭과 도움으로 말미암아 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창조자의 원대한 계획이었고 뜻이었다.

    이게, 아브라함과의 약속이다.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걸, 창조자가 자신의 영인 성령을 통해서 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할 수 있게란 말인가? 동행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요15: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확신하노니,

    성령을 구해야 한다. 성령을 구하면, 성령이 예수에게 매달려 있게 해준다.

    예수에게 매달려 있어야만 예수와 동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이 가장 기뻐하는게 예수에게 매달려 있게 해 달라는 한가지 간구라.

    사람이 예수의 얼굴을 구하며, 예수에게 매달려 있게만 해 달라고 발버둥칠때,

    성령이 그 영혼이 예수에게 매달려 있게 돕는다.

    이게, 복음이다...

     

    • 기독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관계”다.
    • 그리고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구원”이라 말한다.
    • 그러니 죽기살기로 예수에게 매달려 있게 해달라고 “기도” 해야한다.

     

     

    예수에게 매달려 있어야만,

    예수가 그의 뜻을, 그의 심정을, 그의 마음을, 그의 계획을,

    다시 성령을 통해서 사람에게 공급해 준다.

    이게, 복음이다...

     

     

    이 글의 제목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인데,

    서론이 길었네...

     

    처음 "진실추적(Truth Tracking)" 노트를 만들고자 했던 그 때부터,

    진실을 원하는 이들에게 진실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고 한걸음씩 한걸음씩,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예수가 창조자이며, 그가 구원자란 한가지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 글의 서론이 길었던 이유는,

    이쯤돼서 복음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기독교가 무엇인지,

    한번쯤 또는 다시금 되짚어 보고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질을 따랐던  조상이, 바로 "아브라함"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라는 토픽으로, 본질적 믿음, 본질적 관계, 본질적 기독교를 정리하려 한다.

     

     

    아브라함에 관해서라면 밤을 세고 이야기를 해도 부족함이 없겠지만,

    나는 창세기 22장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이, 어떻게 믿음을 따라 살았는지 증거해 보려고 한다.

     

    성령이 성경을 기록하고 증거하기 시작한 시기는 모세때부터다.

    아브라함이 태어났을땐, 성경도 없었고, 율법도 없었다.

     

    예수가 아브라함을 불렀을때 아브라함은 예수를 쫓아 떠났고(창12: 1~5),

    그의 나이 1백세가 되어 준 자녀 이삭을 번제물로 드려라 했을때 드렸다(창22: 1~10).

    성령이 이런 아브라함을 증거하기를 "갈3: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하였으므로,

    이게 바로 믿음이었다. 믿음...

     

    이 기독교의 본질, 믿음, 동행의 포문을 연 인물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다.

     

     

    이제 아래 창세기 22장, 이삭을 번제물로 받치는 아브라함을 바라보며,

    그가 왜 믿음의 조상일 수 밖에 없는지 증거 해 보려고 한다.

    그가 어떻게 이삭을 번제물로 드릴수 있었는지,

    그 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창22: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위 창세기 22장은, 창조자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2) 한 이후,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모리아 산으로 오르는 과정이 증거되어 있다.

     

    나이 1백세에 약속으로 받은 그 아들을, 창조자는 다시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했다.

    육신으로는, 마음이 아프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

    믿음이란, 육신의 아픔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육신의 아픔을 못 느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기적이 아니란 말이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 했을때,

    아브라함이 얼마나 가슴이 메어졌을까는,

    창세기 21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데목이다.

     

    창21: 10 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이스마엘 때문에 근심하는 아브라함이 잘 증거되어 있다.

    하물며 이삭을 번제물로 받쳐야 하는 아브라함이 근심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예수의 명령을 따르는데 방해가 될 만한 모든것,

    자신의 마음이 흔들릴 만한 모든 방해요소를 용납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자신도 이삭을 번제물로 드림이 마음 아팠을텐데,

    만약 사라에게 이 사실을 말했던라면? 사라가 가만히 있었을까?

    ㄴ 사라는 이삭 대신 다른 번제물을 준비하며, 아브라함을 설득했을 것이다. 물론 성경은 그런 증거는 없다.

    ㄴ 만약 성경에 그런 증거가 있었더라면, 이는 아브라함이 창조자를 따르지 못하는 결과가 되었을테니 말이다.

    ㄴ 사라는 분명히 아브라함 앞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말로, 예컨대 여호와께서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 한 것이 이삭이 아닌, 이삭 만큼 흠없는 어린양이리라는, 아브라함을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모리야 산 앞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환들에게 까지, 이삭을 번제물로 드릴것을 숨긴다(5).

    ㄴ 왜? 사환들이 나서서 다른 번제물을 찾으며 이삭을 번제물로 드림을 만류할까봐... 아브라함 자신을 설득할까봐... 자신의 마음이 흔들릴만한 어떤 환경도, 아브라함은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ㄴ 이 글을 읽는 네가 사환이라도, 이삭 도련님을 번제물로 잘 드리고 오소서 하진 않았을것 아닌가. 이는 사환의 도리도 아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브라함을 가로막지 않았겠나.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내 육신이, 내 마음이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런 육신을 뒤로하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게, 믿음이다. 이게, 절대적인 신뢰다.

     

     

    여러차례,

    강도가 아닌 자는, 강도가 될 만한 환경을 만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가 만든 그 환경을 보고, 그가 강도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만든 환경은, 여호와를 쫓아 이삭을 받칠수 있는 환경의 조성이었다.

    이 아브라함이 만든 환경이 곧 열매며, 이 열매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 것이다.

     

    울고 싶으면 울어라...

    짜증 스러우면 짜증을 내.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예수에게 따져라.

    하지만,

    그런 너의 육신과는 상관없이,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예수에게 매달려, 예수와 동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믿음이고, 이게 구원이며, 이게 관계며, 이게 기독교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한 사람의 예가,

    모든 믿는 자들의 거울이 되어야 함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그가 어떻게 창조자를 따랐는가를 보며,

    최소한 지금의 나와 비교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 그러나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믿음.

    본질을 계속해서 망각하는 육신. 그럴때마다, 아브라함은 어땠는가를 떠올려 보는것도 좋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앞서 서론이 길었다는 말을 했다...

    "진실추적(Truth Tracking)" 노트를 만들어야 겠다 마음먹은 그 이유가,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서론들은,

    이미 "진실추적(Truth Tracking)"에 다 담겨있다...

     

    오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하며,

    이제 다시는 본질을 놓치지도, 잃어버리지도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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