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본질. 두번째 시간.

포럼(Forum) 수수께끼 종교, 종교적 관점 믿음의 본질. 두번째 시간.

  • jamnetkr
    2018-10-04 14:52

    할 수 있거든 이곳 포럼의 “종교, 종교적 관점”을 통해서 소개한 아래 글을 한 번 읽어봐…

     

     

     

     

    난 여전히 본질이 무엇인지 아는것이, 본질을 붙잡는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참 이상하지… 알면 도움이 되는 부분이고, 알 필요가 있는 부분이어서, 프리메이슨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에 관한 글을 연재를 했었는데…
    내 육은, 자꾸만 더 그들에게 치우친다. 이게 사람이야…
    육신은 언제나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것에 아주 쉽게 귀기울인다.
    그래서 영에 밝은 사람이라면, 또는 영이 민감한 사람이라면, 내 안에서 지금, 이순간, 내 영과 내 육이 피비린내나게 싸우고 있음을 느낀다.
    난 그렇다…

     

    성경은 창세기 3장에서 뱀을 등장시켰고, 뱀에게 무릎꿇는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이 세상의 주인이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 하는 그의 것임을 이미 증거 하였다.
    동시에 성경은, 그 옛 뱀,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그의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를 향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를 증거한 창조자의 구원의 사역이며, 그의 구원의 역사이며, 그의 이야기임을, 난 증거했다.
    그의 세상. 곧 옛 뱀,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그의 세상에서 그의 종 된 자들을 아는 일은 결코 하찮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누구고, 사단이 그들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볼 수 있다면, 이는 동시에 창조자의 눈동자가 어디로 향해있는지, 그의 시간표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그들을 아는것도, 본질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한가지 진실 않에서의 것이다. 본질과 상관이 없거나 본질에서 떨어져 나가버리면, 그들을 알 건 모르건 어떤 유익이 있으랴.

     

    짧게나마 스스로 작성한 그 글들의 작성 이후에, 자꾸만 자꾸만 더 자극적이고 더 말초적인, 스스로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싶어하는,, 그래서 그들을 더욱 후벼 파볼까? 이 땅엔 어떤 이들이 이미 그들의 개가 되어 돌아다니고 있는지, 역사적 사실과 논리, 근거로 제시해볼까? 이런 내 육신을 느끼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을 보는 지혜는 중요한 것이다.
    세상을 지혜롭게 볼 수 있으려면 먼저 내 영혼이 살아나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숨기고, 숨기고 싶어하고, 숨기기 위해 애써 외면하려 하는 그 음지에서의 행위(음모)들을 볼 수 있고,
    그래야만 사단에게 주어진 이 세상을 살아가며 진짜와 가짜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과 바꿀수 없는 것이며,
    본질은 너희가 그 사단의 세력을 아는것이 아니다.
    본질은 너희가 창조자에게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한가지 진실이며,
    본질은 너희가 창조자에게 매달려 있을때, 너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너희에게 필요한 지혜를 주는게 창조자란 한가지 진실이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가, 너의 영혼을 자꾸만 두드려.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가 너로 하여금 어떤 이들은 상종 조차 할 수 없게 간섭을 해.
    이 본질적 신뢰를…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른다…

     

     

    결론부터 분명히 밝이는데, 믿음이 복권이 아니다. 어떤 성경도 믿음이 복권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희가 원해야 할 것이 오직 한가지임을 가르치고 있다.
    시편 기자가 시종일관 무엇을 노래하더냐. 너희는 오직 그의 얼굴만 구하래. 그러면 그가 자신의 얼굴을 비춰준대.
    비전? 사명감? 비전과 사명감을 가리자고 가르친 성경이 어디있냐. 가져와봐!
    비전? 사명감? 그런 거짓말 하지 말래. 너의 육에서 나온 그 사명감이 마땅히 너의 육의 것이래.
    너희는 그저… 그의 얼굴을 찾으래…
    이 기독교의 관계학의 마침표를 예수가 스스로 이 땅에서와 다음과 같이 찍었다.
    몇 번을 반복하는 성경이지만…

     

     

    요1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너희는 그저… 매달려만 있으래…
    길을 걸어도 너희가 가는게 아니래…
    너희는 그저… 매달려만 있으래…
    그러면, 너희가 꿈꿔보지도 못했던 세상으로…
    자신이 데려간데…
    그래서 자신의 멍애는 쉽고 가볍데…
    이 관계가, 이 신뢰가, 믿음이다…

     

    너희가 머리를 뱅그르르 돌리며 무엇인가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예수란 존재는 그렇다.
    너희가 예수를 위한답시고 어떤 생각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예수란 존재는 그렇다.
    예수는 오직, 너희가 자신에게 매달려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길 원해. 이게 본질이다.

    이 본질적 관계를, 이 믿음의 본질에 관하여 히브리 기자는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히11: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구절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면, 히브리 기자가 연이어 등장시키는 믿음의 선진들이 어떤 이들이었는지 보면 된다.

     

     

    •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낳은 제사를 드렸고,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않고 옮기웠고,
    •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지었고,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에 순종했고,
    •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 늙어 단신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고,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 받을때 이삭을 제물로 드렸고,
    •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믿음으로 요셉은 자신의 유골에 관하여 명하였으며,
    • 믿음으로 모세가 태어났을때 그 부모는 아이를 석달 동안 숨겼고,
    • 믿음으로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였다고 하였다…

     

     

    히브리 기자가 증거한 이 믿음의 선인들이 모두 어떠했다는 것인가.
    그들이 창조자에게 무엇을 바랬나? 그렇지 않다. 그들이 창조자를 앞 서 행했나. 그렇지 않아.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자의 존재를, 그냥 신뢰한 것이다.
    이 절대적인 신뢰를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른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이 나라를 위해 어떻게 어떻게 해 주소서 하는게 아니다. 그런건 근본적으로 믿음도, 기도도, 아니다.
    네가 제아무리 기도를 한 들, 예수가 자신의 뜻대로 이루리라.

     

    이 믿음의 선인이란 인물들이 어떠했다는 것인가.
    병에 걸리면 병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이냐.
    나라가 망조가 들었으면 나라를 치유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인가.
    그런건 근본적으로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창조자의 주권하에 있다는 그 절대적인 신뢰다.
    오늘 길을 걷다 네 발에 거미가 밟혀 죽었다면, 그 거미가 아무런 이유없이 너의 발에 밟힌것이 아니야. 창조자의 주권하에 밟혔다는 절대적인 신뢰다.
    네 방 창틀에 매달려 있는 거미가 스스로 매달려 있는게 아니래. 창조자의 주권하에서 창조자가 매달아 놓았단다. 이 절대적인 신뢰를 믿음이라고 한다.
    그의 주권하에 있다는 신뢰가 믿음이다…

     

    설사 내가 죽을 운명에 처했어도, 믿음의 사람은 나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는다.
    설사 내가 죽을 운명에 처했어도, 믿음의 사람은, 그가 더 낳은 부활의 몸으로 데려 갈 것이라고 신뢰한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그의 주권을 의지하는 것이지, 내 바램이 아니다.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그의 주권을 의지하여 매달려 가는 것이지, 내 육의 눈에 좋아보이는 내 육의 이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앞 서 분별력 없는 이들의 예를 들었었다.

     

    예수가 친히,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짊어진 이후엔 어떻게 되었나. 기록된 바,,

     

     

    고전2: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자신의 영, 곧 성령을 주겠다고 한 것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이었다고 한다.
    이 자신의 영, 곧 성령이 인생들곁에 있는게 더욱 유익하여, 예수는 승천했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나도 않다…
    어떤 사람들이 흔히 하는말, 문제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본받지 않는 다는것! 과 같이 하는 말들을 수없이 들어 보았으리라.
    이 말은, 간디도 한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번 물어보자. 성경이 이와같이 예수의 영, 곧 성령이 아니면 그의 뜻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아니면, 우리는 예수를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다.
    그러면 성령을 받지 못한 간디가, 누군가를 가리켜 그가 예수를 닮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하랴? 네가 스스로 판단자냐? 네가 스스로 판단자면 네가 바로 창조자라.

     

    이 글을 읽게 될 어떠 어떠한 기어들아…
    원컨대, 눈에 보이는게 아무것도 아니다…
    때로는 너보다 강한자가, 너보다 권력자가 널 그릇되게 생각하고, 하찮게 여기고, 힘있는 자가 널 짓 누르려 하고…
    때로는 인생이 공평치 않은것 같고, 울분을 토하고 싶고, 낙심하게 되고, 두려움이 가슴에 사뭇치고…
    때로는 기대고 싶고, 때로는 눈에 보이는 한낯 인생일 지라도 붙잡고 싶고, 누가 날 돕지 않을까, 누가 날 살펴보지 않을까…
    하지만 노여워하지 말아라. 두려워 하지도 말아라.
    어제도 한 말인데 무슨 말을 하겠냐.
    솔로몬이 받은 그 영관이 꽃 한송이 만도 못했데…

     

    눈에 보이는게 아무것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게, 창조자의 주권하에 있음이다…
    진노의 잔이 차기까지 마땅이 받아야 할 저주를 그에게 쏟아 부으려고 오늘 너에게 허락된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할테냐.
    네 눈에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그가 없는게 아니야. 그가 이미 너의 미래에 가 있는 자라. 그래서 성경은 그를 알파와 오메라가 증거했다.
    오늘 너를 괴롭게 하는 누군가를 보거든, 너는 마음으로 나마 그를 가엾이 여겨라. 그게 마땅하다.
    창조자가 뿌린데로 거두게 하리라…

     

    누구라도 믿음이란, 그 믿음의 본질을 알게되면…
    그러면 더는 두려워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아도 된다…
    믿음이란 절대적인 신뢰야…
    모든 주권이 창조자에게 있다는 신뢰…
    네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창조자의 주권하에 창조자가 주장했다는 그 신뢰…
    이 신뢰를 믿음이라고 말한다…
    살아있는 그 창조자가, 모든걸 주관하고 역사한다는 이 절대적인 신뢰가…
    바로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