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쭈리]조선을 떠나며 : 해방 이후 조선 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홈(포럼) 포럼(forums) Forum Category 5 ‘수수께끼’ 역사와 교훈 [만쭈리]조선을 떠나며 : 해방 이후 조선 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이 게시글은 0개 답변과 1명 참여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jamnetkr Jamnetkr : 리테일 숍에 의해 3 월, 1 주 전에 업데이트 됐습니다.

  • 글쓴이
  • #100007993
    jamnetkr
    Jamnetkr : 리테일 숍
    Moderator
    Newbie
    8,689 points

     

     

    조선을 떠나며 : 해방 이후 조선 땅에 남은 일본인들의 삶.

     

     

    533725F0-AD95-486D-96A8-DC75AACA846E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로 일본인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나라에 남아서 생활했고,

    또 어떤 식으로 빠져나가고 귀환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런 면에서 ‘조선을 떠나며‘라는 책은 그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책 내용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시점에서 그려진 회고담이다.

    여기서는 책을 보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약간씩 발췌, 각색해서 올려 본다.

     

     

    1. 38선 이남의 일본인들(패전 당시의 일본인).

     

     

    3A332F66-3BC9-478E-8669-539B386034EC

     

    1945년 8월 9일 함경도 회령 : 소련의 8월 폭풍 작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다음날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더니 만주 지역에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그러자 이곳을 지키고있던 일본의 관동군 수뇌부는,

    곧바로 열차를 동원해서 고위 관료와 군 관계자 가족을 서둘러 남쪽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만주 현지에 있던 100만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어떠한 대피 명령조차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수의 일본인들이 소련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희생되고 고아들이 대거 발생하게 되었다.

     

     

    F3FC0418-59A0-48DC-82AE-F45BA198AC2C

    < 8월폭풍 작전 당시 소련군 >

     

     

    그런데 사흘 뒤,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소련군이 함포사격에 이어 시가지 상륙을 개시하자 함경북도를 관할하던 일본 군부는 서둘러 열차를 수배하여 군인 가족들만 태우고 경성으로 출발해 버린 것이다.

     

    그러는 동시에 조선인들과 일본 민간인들에게는 소집영장을 띄워서 회령에 있는 군부대로 모이게 했다.

    군부는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당시 비료공장에 다니던 사바타 겐조는 이렇게 회고했다.

     

     

    • 비료공장 직원 사바타 겐조 : 영문도 모른 채 수많은 사람들이 소집영장을 받고 회령의 군부대로 모여들었다. 그곳에 관리자들은 우리에게 무기 대신에 삽 한자루씩을 쥐여주고선… 소련군의 총알받이로 삼으려 했다.

     

     

    2. 1945년 8월 15일 부산의 한 관공서 : 예상된 항복 발표.

     

     

    상부로부터 정오에 중대 발표가 있을 예정이라는 전갈이 내려졌다.

    공무원들이 들어보니, 그것은 예상대로 항복에 관한 내용이었다.

     

     

    • 부산지방교통국장 다나베 다몬 : 공교롭게도 이날은 일본이 4년 전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도발하고부터 시작된 부산 지역의 등화관제가 해제된 날이기도 했다. 때문에 조선인들에게는 야경을 만끽하며 비로소 해방을 실감할 수 있는 뜻깊은 날이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을 비추는 환한 불빛이 결코 달갑지만은 않았다.

     

     

    667D8796-8A19-47D0-A8D3-D31BDECA9F81

     

     

    1945년 8월 15일 경성전기회사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경성전기회사의 사장 호즈미 신로쿠로는 황급히 지금의 을지로 입구에 있는 사옥으로 갔다.

     

     

    • 경성전기회사 사장 호즈미 신로쿠로 : 만약 단 1분이라도 정전 사태가 발생한다면 무서운 결과가 초래할 것이다. 그러니 직원 여러분은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임하도록.

     

    그는 위급한 시국에 정전사태라도 발생하게 되면 일본인들에게 극심한 공포심을 조장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1945년 8월 중순 부산항 : 밀항선.

     

     

    2D1250B7-8621-4645-8399-0CD81020F082

    < 당시 밀항선의 모습 >

     

     

    돈 있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재빨리 밀항선으로 귀국했다.

     

     

    • 교사 후지와라 지즈코 : ‘나만 살겠다’는 원초적 본능만 남은 조선의 일본인들에게 천황의 백성이라는 애국심은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이들은 그저 어떻게 하면 가족들이 일본으로 안전하게 돌알갈 수 있을지, 또 조선 땅에서 일군 재산을 어떤 방법으로 한푼도 빠짐없이 가져갈 수 있을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 조선인에 대한 갑작스런 공포심

     

     

    02E02B0D-7940-44A5-AAA4-002A1F1A596D

    < 1945년 8월 16일 : 만세를 외치는 군중. >

     

     

    • 경성전기회사 사장 호즈미 신로쿠로 : 사무실 밖으로 조선인들이 만세를 외치며 경성역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8월 15일 이후 1주일간의 폭행 사건.

     

     

    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보고된 폭행 사건은 총 913건이었다.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습격한 곳은 주로 경찰관, 지방행정기관, 신사였다.

    또 개인을 상대로 한 살인과 폭행은 총 267건으로 보고 되었는데, 주된 표적은 경찰관, 교사, 공무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었다.

    당시 보고 체계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오지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은 집계에서 누락되기 일쑤여서 보고 수치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일본인보다 조선인의 피해자가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이유가… 뭐였을까…?

    일본인 상관들이 조선인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먼저 피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도 했지만, 일본인 상관보다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악역을 도맡아했던 조선인들에게 악감정이 많았던 탓이기도 했다.

     

     

    72AAA7DF-68B5-4221-859D-83C710E095AC

    < 해방직후의 조선인들 >

     

     

    ● 1945년 8월 18일 조선총독부.

     

     

    이날 조선총독부는 각 기관에 급하게 전달한다.

     

     

    • 아베 노부유키 : 각 기관에 걸어둔 천황의 사진을 모두 불태워라! 또 각지역의 신사에 연락해 위패를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하라!

     

     

    그들은 행여나 조선인들의 심기를 상하지 않도록 재빠르게 대응했던 것이다.

     

     

    ● 뜻밖의 공포 : 조선인들이 이렇게도 많았나?

     

     

    당시 일본인들이 느꼈던 공포심은 평소 조선과 조선인들에 대한 총체적인 무관심에서 비롯됐다.

    사실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 호즈미 신로쿠로 : 이런 경향은 식민 지배 초기에 수많은 조선인의 저항을 경험한 1세대와 달리 문화통치 시기(1920년대)에 이주해 왔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2세의 경우에 더욱 강하게 나타났는데, 이들은 조선을 타지로 인식하기 보다는 일본 본토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 일본인 촌 : 그들만의 분리된 공간.

     

     

    대부분의 일본인이 패전 직후에 나타난 조선인의 집단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집단을 이루며 조선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공간에서 따로 살고 조선인들을 도시의 변두리로 몰아내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인촌이 당시 한반도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4D8D72D9-D1DC-43FE-AE8F-5A154BDB2B1C

    < 원산의 일본인촌의 모습 : 철길 너머로 조선인들의 거주지가 보인다. >

     

     

    이러한 일본인촌에는,

    철도역과 정거장, 학교, 병원, 관공서, 백화점 등의 편의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고,

    경찰, 군대 등 치안기관을 유치해 더욱 안전하고 편안한 곳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렇게 일본인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조선인들과 분리되어 살았기 때문에 평소 조선인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 일본인들의 증언 : 여기 일본 아니었어?

     

     

    798A6392-0696-4715-A333-63A80D51546C

    < 일제시대의 소학교 교실 >

     

     

    당시 초등학생(소학교 학생)이었던 한 일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 원산부립소학교 2학년 마쓰나가 아쿠오 : 한번도 조선인 친구와 놀아본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조선인은, 가끔씩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물건을 팔던 아줌마가 전부였다. 원산에 그렇게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패전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경찰서에 근무하던 청년은 이렇게 물었다.

     

     

    • 나카무라 기미(당시 23세) 충남 강경 경찰서 근무 : 패전했기로서니 꼭 내지(일본)로 돌아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의 부모님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고만 대답했다.

    그는 왜 자기가 자신의 고향인 충청도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패전 직후 조선인들이 왜 거리를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치는지도 이해 못했다.

    -나카무라 기미(당시 23세) 충남 강경 경찰서 근무

     

     

    ● 갑자기 달라진 세상(돈을 인출하려는 일본인들).

     

     

    • 이노우에 스미코 충무로 경성우편국 근무 : 요즘은 밤이 깊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편예금을 인출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든 바람에 출금 업무가 갑자기 늘어났기 때문이다.

     

     

    은행에는 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8월 15일에만 은행이 보유한 지급준비금의 20%가 빠져나갔는데

    이런 속도로 돈이 빠져나간다면 곧 은행은 파산이 나고 말 것이다.

     

     

    CEFA6446-AC04-41D0-B687-5ED9CA5F3CBC

     

    A00F5B89-B572-413A-8423-1760823736B6

    < 일제시대 은행 내부 >

     

     

    만약 그렇게 되면,

    예금한 돈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어 수많은 예금자들은 화가 나서 은행을 때려부수려 할 것이 뻔하다.

    때문에 8월 17일부터 총독부에서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일본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 총독부 : 예금은 언제든지 인출할 수 있으니 안심들 하삼. 지금 큰 돈을 인출했다가 공연히 도난 사선에 휘말리지 마시고.
    • 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 나오마사 : 하지만 하루 빨리 재산을 찾아서 일본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쇠 귀에 경 읽기였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 강탈을 당해도 신고할 수 없었다. 은행에서 인출을 하고 돌아오다가 돈을 강탈 당했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일본인들은 어차피 경찰에 신고해봐야 소용 없다며 분을 삭일 따름이었다.

     

     

    ● 거리마다 넘쳐나는 물자.

     

     

    60098FD5-0D05-4791-900A-46D705142F80

     

     

    패전 후 조선 전역에서 나타난 특이한 현상 중 하나는,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시중에 전례 없이 물자가 풍족해졌다는 점이다.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다음날 남대문시장에는 거짓말처럼 , 설탕, 밀가루, 옷감, 가죽제품, 구두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246704F8-C099-485D-A9EE-FA73DFE7E509

    < 충무로 모습 >

     

     

    전쟁 수행 중에는 좀처럼 구경할 수 없었던 각종 물자가 한꺼번에 시중에 풀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북한지역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바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살림을 처분하고 일본으로 귀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모든 세간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당장 배를 타고 항구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런 일본인들의 심리를 꿰차고 아예 조선인 고물상들은 일본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물건들을 값싸게 구매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대전과 같은 지역에서는 쓸만한 물건을 사려는 조선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전에 없던 시장이 하루아침에 생겨나기도 했었다.

     

     

    ● 일본인들의 투매 행위 비난 : 조선의 재산을 함부러 팔지 말라.

     

     

    한편 조선인 지도층들의 생각은 이랬다.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일본인이 소유한 것은 바로 ‘조선에서 조선인을 부려서 일군 것‘.

    때문에 일본인 재산은 그 형태를 막론하고 조선인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일본인들 재산을 매입하는 행위는 해방 조선의 부를 유출하는 이적 행위요,

    공공의 재산을 개인의 것으로 독점하는 반사회적 악덕 행위로 간주했다.

    그렇게 일본인들의 투매 행위에 대해 조선 사회의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미군정 또한 일본인들의 재산 반출에 여러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가지고 갈 짐에는 중량을 제한 했으며 현금은 1,000엔 이상의 반출을 금지했다.

     

     

    4D994702-E2B2-424C-B10E-472092FC23F0

    < 떠나는 일본인들 >

     

     

    이러한 제한 조치 때문에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어떤 짐을 가져가고,

    또 가재를 팔아 마련한 돈을 어디에 숨겨 가야 할지 저마다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귀환 열차 속의 풍경.

     

     

    090751AD-C829-4791-8F12-DCD8672A7D62

    < 당시 귀환열차 >

     

     

    귀환 열차에 오르다가 넘어진 앞 사람이 무거운 배낭 때문에 혼자서 일어나지도 못하니, 그 모습이 참으로 비참했다.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열차에 오른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무거운 짐 때문에 하나같이 중풍 환자나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등에 짐을 짊어지고 젖먹이 아기까지 감싸안고 있는 아낙의 모습을 보자니 씁슬했다.

     

     

    63D0B104-CA0C-4059-813A-9F9AAAC5782A

     

     

    • 고타니 마스지로 인천일본인세화회장 : 고작 이것이 수십년 동안 일하여 얻은 전 재산의 말로구나!

     

     

    당시 남한과 북한이 달랐던 점.

    돈을 허리춤이나 옷섶에 넣어 보이지 않게 다시 꿰매거나, 커다란 붓 속에 지폐를 말아 넣는 등의 방법은 이미 낡은 방식이 되면서 단속을 피하기 위한 다양하고 기발한 수법이 끊임없이 동원되고 있었다.

     

     

    C65812F1-C7B1-4AD0-B950-989BC27C9738

    < 당시의 송환선 >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돌아간 남한의 일본인들은 북한에서 돌아간 사람들과 비교해보자면 상황은 훨씬 나았다.

    북한에서 돌아간 일본인들의 경우는 자전거, 라디오, 축음기, 재봉틀, 서적류는 물론 심지어 이불개인 화장품까지도 공출 대상이었다.

     

     

    ● 일본인들이 느낀 패전후 몇달간의 변화(1945년 8월 16일 : 독립만세).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 거리에는 가는 곳마다, 일장기를 재활용해 만든 어설픈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질주하는 트럭은 물론이고 전차 지붕에서도 조선인들이 외쳐대는 만세소리가 들려왔다.

     

     

    ● 1945년 9월 5일 : 조선에 남고싶은 일본인들.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들의 만세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고 일본인들도 점점 무뎌져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귀환열차가 출발한다는 헛소문이 돌아 멀쩡한 가구를 헐값에 내다 팔며 부산을 떨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불편해서 못 살겠다며 다시 세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또 어느 정도 치안이 확보되는 낌새가 보이자 어떻게든 조선에 눌러앉아보려는 사람도 늘어갔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 눈치 빠른 사람들은 지금 일본의 주요 도시들은 대공습으로 초토화되었고, 그나마 멀쩡한 도시도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에 돌아간다고 한들, 비전이 없을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조선에 어떻게든 남아있으려고 했다.

     

     

    ● 1945년 가을 : 점차 안정을 찾는 사회.

     

     

    8월말부터 푸줏간에는 오랫동안 구경하기 힘들었던 고기가 내걸렸고 술집에는 각종 술이 넘쳐났다.

    다시 문을 연 카페에서는 전쟁의 선전가요가 아닌 대중가요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차림새도 칙칙한 국민복을 벗어던지고,

    여성들도 볼썽사나운 몸빼바지 대신 치마를 걸치기 시작하여 거리의 풍경도 한층 밝아졌다.

     

    거리 뒤편의 상점들에서는 “배척하자 일본인”이라고 적힌 전단을 떡 하니 붙여놓고,

    조선인들이 일본어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 조선인들은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에게 물건을 팔기는 했지만 가는 곳마다 왜노(倭奴)추방이라고 써 붙인 자극적인 전단지가 계속해서 눈에 거슬렸다.

     

     

    ● 1945년 겨울 : 사라진 일본어.

     

     

    11월에 들어서는 어느새 일본식 동네 이름들이 모두 조선식으로 바뀌어 길 찾기도 어려워졌다.

    관청에서는 각종 서류에 ‘쇼와‘, ‘메이지‘ 같은 연호를 기재하면 아예 접수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그저 이름만 바뀌었을 뿐인데 경성은 어느새 낯선 공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라디오 방송도 10월 말부터 과도적으로 한일 양국어를 사용하다가,

    얼마 후 뉴스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어로 단일화했다.

     

     

    12월에 들어서는 그런 뉴스마저 하루에 단 1회로 줄어들었다.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다나카 마사시 : 경성에서는 이제 제국의 언어(일본어)가 발붙일 곳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북한과 비교하면 그래도 양호했다.

    북한에서는 8월 29일부터 라디오에서도 전면 일본어가 배제되었다.

    때문에 갑작스런 정보의 차단으로 당시 일본들은 몹시도 불안해 했었다.

     

     

    ● 조선에 눌러앉고 싶은 일본인들.

    ㄴ 1945년 9월 12일 경성 : 때 아닌 조선어 강습 열기

     

     

    경성 YMCA 청년회관 로비에는,

    어린 학생에서 백발이 성한 노인들까지 삼삼오오 모여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바로 이들은 조선어를 배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당시 강단에 선 일본인 강사는 이런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조국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으로 발생한 현 상황은 비록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명연자실하여 넋놓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조선어를 배워 새로운 조선에 우리도 협력합시다.”

     

     

    이렇게 수강생들을 격려했다.

    당시 조선어 강좌는 1945년 9월 12일부터 3개월 과정으로 일주에 3회, 90분씩 진행될 예정이었다.

     

     

    4AC400F8-67B9-465C-A104-C1F728296528

    < YMCA 내부 >

     

     

    그런데 수강생을 모집하자마자 희망자가 정원을 넘어서는 바람에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학급을 증설해야 할 정도였다.

     

     

    ● 미군에 대한 불안 : 일본인 위안부를 모집하자.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 2~3일 동안 매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조선인들이 독립만세를 외쳐대는 통에, 일본인들은 두려워서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게다가 북한에는 이미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인천에도 곧 미군이 상륙한다는 소문이 돌자,

    일본인들은 점령군이 자신들을 어떻게 대할지 몰라 몹시도 불안해 했다.

    심지어 일본인들은 자체 회의를 열어,

    일본인 여자들 중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전문 위안부를 모집하여,

    따로 유곽을 열면 어떻겠냐는 주장도 하고 있었다.

    차라리 성매매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부녀자에 대한 성폭력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되지 않겠냐는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32C082AB-CBE3-48BA-B52D-C3BB404E38E7

    < 미군부대의 일본 매춘부들 >

     

    그러나 다행히도 미군은 기강이 잘 잡혀 있어 걱정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군이 진주하고 치안이 안정되자 얼마 전까지만해도 피난갈 곳을 찾느라 정신이 없던 일본인들은

    서서히 조선 땅에 눌러앉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 떠나는 일본인들.

    ㄴ 밀항선, 도둑배.

     

     

    77C77D7B-B9B4-4BA9-8394-F4E0E0D580EC

     

     

    패전 당시 해외에 있던 일본인들은 어림잡아 총 700 만명에 달했다.

    동쪽의 태평양 열도에서 서쪽의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북쪽의 만주에서 남쪽의 인도네시아까지,

    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모두 송환선이라는 배를 타고 가야 했다.

     

     

    다만 한반도는 여타 식민지에 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공식 송환선 외에 밀항선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 밀항선은 도망치듯 떠난다하여 속칭 ‘도둑배‘라고도 불렀다.

     

     

    2D1250B7-8621-4645-8399-0CD81020F082

    < 당시 밀항선의 모습 >

     

     

    한반도에서 돌아간 일본인들을 보면 민간인은 약 70여만명, 군인은 20여만명으로 추계하고 있는데,

    이들 중 20만명 정도는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한 도둑배들은 위험을 무릅써가며 단기 특수를 노렸기 때문에 돌아갈 때는 빈 배로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승객을 태우지 못하면 하다못해 밀수품이라도 싣고 갔다.

    하지만 그런 덕분에 나중에는 그걸 노리는 해적들까지 등장하게 된다.

     

     

    송환선 vs 밀항선 무얼 타고 갈것인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밀항선과 공식 송환선 중에서 무엇을 탈 것인가는 단순히 교통편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향후 그들의 인생이 걸린 도박과도 같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밀항선의 경우 검역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전염병에 감염될 우려도 있었고,

    악덕 업자를 만나면 어렵게 가져온 재산마저 모두 빼앗기고

    엉뚱한 곳에 내려놓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밀항선을 타고자 했던 이유는 분명했다.

    공식 송환선을 타고가면 심사과정에서 반출 상태를 면밀히 수색당해야만 했다.

     

     

    C65812F1-C7B1-4AD0-B950-989BC27C9738

    < 당시의 송환선 >

     

     

    당시 민간인은 1000엔, 군인은 200~500엔 사이로 소지 금액이 제한됐고,

    수하물도 휴대 가능한 보따리 정도로만 제한했었기 때문이다.

     

     

    ● 두고가는 공동묘지의 처리.

     

     

    일본인 공동묘지 처리는 큰 고민거리였다.

    인천에 사는 일본인들은 그대로 놔두면 안되냐며 조르고 졸랐지만 이에 인천시장은 이렇게 큰 소리쳤다.

     

     

    • 인천시장 : 아놔, 만일 동경 한복판에 조선인 묘지가 있다면 니들은 그거 그대로 놔둘래? 애초에 니들 맘대로 우리 땅에 공동묘지를 만들지 않았음?

     

     

    결국 인천시는,

    공동 묘지를 모두 없애고 일본인 유골들은 구덩이를 파서 모두 한곳에 매립시켜 버렸다.

    떠나기 전에는 미처 생각치도 못했는데 막상 떠나려고하니,

    일본인들은 조상의 무덤까지도 신경 써야 했던 것이다.

     

     

    2. 38선 이북의 일본인들.

     

     

    ● 무지막지한 소련군의 실체.

    ㄴ 1945년 8월 말 평안북도 강계 : 일본인촌.

     

     

    일본인 촌의 젊은 처자들은 소련군이 오고있다는 소식에 황급히 수수밭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미처 집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다락과 지하실로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궜다.

     

    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여자들은 모두 머리를 잘랐다.

    머리를 빡빡 깎은 여성은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소문에 모두 까까머리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백주 대낮부터 조선인을 앞잡이로 세워 마을의 일본인 집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0E3A7492-ECD8-4FA8-9837-4BD991B51F22

    < 당시의 소련군 >

     

     

    그들은 무언가 돈이 될 만한 물건이 없나 여기저기를 뒤졌고..

    그중에서도 소련군은 유독 시계와 만년필을 좋아했다.

    술을 달라는 병사도 있었다.

    하지만 술을 내주면 순순히 돌아가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들이 술에 잔뜩 취해 다른 집으로 들어가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29A06B29-8C61-47D5-ACD2-5DDA37D43E67

    < 미국 잡지를 보고 좋아하고 있는 소련군 >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소련군에게 절대 술을 내주지 않기로 사전 약속까지 하게된다.

    하지만 소련군 한 무리가 지나가고 나면 곧 또 다른 패거리가 나타나 이번에는 이불과 담요를 가져갔고,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겠거니 생각할 무렵에는 여군들이 와서 취사도구를 챙겨갔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소련군의 현지 조달 방식이었다.

     

     

    ● 1945년 8월 말 평안북도 곽산 : 충격적인 소련군의 모습들.

     

     

    소련군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당시 한 일본인의 목격담이다.

     

     

    • “윙~윙~” 소련군이 곽산에 온다는 사이렌 신호가 떴다. 조선 사람들은 겉으로는 환영하는듯 했지만 사실 그들도 안심할 수 없었고 부녀자들은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 시계나 금붙이 등을 숨기고 있었다.

     

     

    CD58B100-8C73-4968-B3C5-7700D9730F35

    < 북한 주둔 소련군 >

     

     

    실제로 소련군은 전투태세로 침공해왔기 때문에,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약탈과 폭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런 소련군의 행렬을 보면 모두들 적잖이 놀라게 된다.

     

     

    • “아! 이것이 정녕 현대군의 모습이던가?”

     

     

    마차를 앞세운 긴 행렬이 이어지고 긴 장총을 어깨에 걸쳐 걷는 소련군들은,

    마치 유목민의 모습과도 같았다.

    군대의 행렬 후미에는 양과 닭까지 매달고 있었다.

    심지어 마차 위에는 부뚜막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소련군들은 개고기는 역시 누렁이가 최고라며,

    주인이 있든 없든 길에 나다니는 개가 보이기만 하면

    어김없이 총을 쏘아 잡으며 행군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무기와 탄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지에서 조달하고 있었다.

     

     

    4357530F-1DCC-4B9D-8410-858DD6A7A31C

     

    94B5FD63-85EE-4A7B-98A8-91AD1E58D393

    < 소련군 >

     

     

    원래 철도와 교량 경비를 위해 평안도 곽산에 들어왔다지만,

    실제로는 기계와 설비를 뜯어 소련으로 실어가려는 목적으로 온 것이었다.

     

     

    소련군과 대조적인 미군의 모습; 그에 비해 미군이 주둔하던 한반도 남쪽의 일본인 목격담은 이렇다.

    대략 500~600명 규모의 미군이마을에 진주했는데,

    일본인들은 이들이 가져온 장비와 물품을 보고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우아! 일본이 정녕 이런 나라를 상대로 4년 동안이나 전쟁을 벌였단 말인가?”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언뜻 보아도 미군은 모두들 최신식 무기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오지에 주둔하면서도 침구와 식량, 심지어는 개인이 마실 물까지 휴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 소련군의 현지조달.

     

     

    소련군은 왜 북한에 주둔했나?

    원폭 투하로 일본에 대한 각종 이권이 미국으로 대거 넘어갈 듯 하자

    소련은 서둘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동아시아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다.

    사실 소련군은 한반도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 “아놔! 그러면 왜 한반도의 반쪽을 차지했던거임?”

     

     

    그저 바람이 있다면,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하나 그쪽 동네에 만들면 그것으로 만족할 정도였다.

    당시 소련의 주된 관심 지역은 동유럽이었지 동아시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도 한반도보다 전통적으로 소련의 목을 조여온 만주지역,

    그리고 일본과 이권을 다투던 홋카이도, 사할린 지역을 소련은 더욱 중시했다.

     

    따라서 소련은,

    애초에 한반도는 별 관심이 없었고 북한을 먹은 것도 만주, 사할린 지역과 연동되는 형태로 이뤄진 것이었다.

     

     

    ● 소련군의 현지조달의 배경.

     

     

    소련은 2차대전에서 비록 승전국 반열에는 올랐지만,

    까놓고 말하자면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2차 대전 중으로 2,500만명이 사망했는데 이것은 대전으로 죽은 전세계 사망자의 40%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또 전쟁으로 GDP가 17%나 감소했기 때문에 종전 후 소련의 최우선 과제는 무엇보다 노동력 확보와 경제복구였다.

    이런 상황과 맞물렸으니,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주둔 비용은 철저히 현지 조달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이었다.

     

     

    582AAB67-10B7-44B5-86C1-B474210B4210

     

     

    심지어 소련군 병사들의 월급도 북한 재정으로 충당하고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배상 명목으로 수풍발전소를 비롯해 한반도의 주요 공장시설, 광물자원, 생산품 등을 마구 반출하고 있었다.

     

     

    • “아놔, 일본 걸 뜯어가야지. 왜 우리나라 걸 뜯어가는건데!”

     

     

    ● 1946년 1월 초 평양 : 일본인은 소중한 노동력.

     

     

    미소 공동위원회를 앞두고 북한에 있는 일본인들의 남하 문제를 논의하게 위해 미군 장교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소련군 관계자는 상부로부터 일본인 송환에 관한 지시를 따로 받은 것이 없었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 “일본인들을 그대로 돌려보내기에는 ‘매우 귀중한 노동력’임.”

     

     

    현지조달과 노동력의 확충 북한을 상대하는 소련의 인식은 철저히 뜯어먹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생산 설비만 반출해간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생산시설을 가동하여 완제품을 만들어 반출하고 나중에 생산 설비를 뜯어가는 형식이었으니
    그야말로 꿩먹고 알 먹는 방식이었다.

     

    그런가하면 소련군이 보기에 일본군 포로는 더 없이 훌륭한 인적자원이었다.

    본인들 중에서는 고등교육을 배우고 고급 기술을 연마한 엔지니어가 많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애초에 소련군은 일본인들을 본토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1946년 3월까지 남한의 일본인들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북한의 일본인들은 여전히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 북한 거주 일본인들의 호구지책.

    ㄴ 목욕탕에서 허드렛일을 하게된 학교교장.

     

     

    도코 요시마사는 원래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지만,

    그는 이제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겨우 찾게된 것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의 일이었다.

     

     

    AADF124A-A660-474F-AF41-9C39B3C3E9B6

    < 일제강점기 시절 목욕탕 >

     

     

    아침 일찍 욕조에 물을 받고 장작을 때워 물을 데우는 일이라 일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과 대면하면서 그가 받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한게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일부러 다른 사람도 들으라는 듯이 여기저기서 더운물을 가져오라고 시켰고,

    그럴 때마다 그는

     

     

    • “네!”

     

     

    라고 답하며 물을 대령해야만 했다.

    때로는 꼬마들까지 이렇게 놀렸다.

     

     

    • “이르본(일본)!”

     

     

    하지만 먹고살려면 어차피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오히려 더 기분 나쁜 것은 일본인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척 하면서 은근히 염장을 지르는 이들이었다.

     

     

    • 정주 소학교 교장 도코 요시마사 : “와! 패전 덕분에 목욕탕에서 시중드는 일본인 나리를 다 뵙게 되네”

     

     

    ● 로스케 마담이 된 일본 여자들.

     

     

    1945년 가을 함경북도 성진.

    이곳의 주택가를 스치고 지날 때마다 나날이 일본인들은 야위어만 갔다.

    먹을 것도, 돈도, 입을 것도 점점 궁해 보인다.

     

    그런 한편, 암시장은 성황을 이뤘다.

    모두 일본인에게 약탈한 물건들이었다.

     

    시장 한편으로는 사과, 감, 털게, 조선 엿, 육류 등이 쌓여 있지만

    일본인들을 물물교환할 옷가지마저 없어 그저 침을 삼키며 바라만 볼 뿐이었다.

     

    예쁘게 옷을 장식을 한 소련 장교 부인, 몸을 화려하게 꾸민 조선인 부인 사이로

    그야말로 상거지나 다름없는 몸빼바지 차림의 일본 부인이콩을 바꾸어 가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다.

     

     

    189BE7B1-5048-4B38-988A-73743DA70900

    < 일제강점기 평양의 거리 >

     

     

    • 고니시 아키오 세화회 섭외부장 : 조선인 냉면 가게나 주막에서 일하는 일본 여성도 늘어났다. 이들은 새하얀 분과 붉은 입술을 한 일명 ‘로스케 마담’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들의 주요 고객이 러시아의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 가르치던 학생 집에 식모로 들어온 교사.

     

     

    생활난에 허덕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경영하는 이발소, 여관, 목욕탕 등에서 잡일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녀자들은 부유한 조선인 집이나 소련군 관사 등에 들어가 가정부로 일하기도 했고,

    농사 한번 지어보지 않은 사람이 중국인 밭에 약초를 캐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점령 당국이 1946년 1월부터 일본인의 상업활동을 부분적으로 허가하여,

    일본인들 중에서 담배, 두부, 비누 행상에 나서는 자도 나타나게 됐다.

    다만 이런 행상의 경우는 조선인 상권 보호를 위해, 일본인 마을에서만 허용되었다.

     

    수입이 없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과거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 집에 식모로 들어간 여교사도 있었다.

    그녀는 평안북도 정주에서 일하던 곽산소학교 교장의 딸, 도코 도시에였다.

    그녀는 한때 학교의 여교사로 있었지만

    패전이 되자 한 부유한 조선인 집에 들어가 가정부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 정주 소학교 교장 딸 도코 도시에 : 그런데 원래 자신이 가르치던 아이의 집이었으니 조선인 고용주는 그녀를 매우 딱하게 여겼다. 하지만 조선인 고용주가 신경을 써줄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

     

     

    ● 캄차카의 고기잡이 선원 모집.

     

     

    1946년 초 남한에서 일본인의 송환이 마무리 되고 있을 무렵,

    소련 당국은 흥남 공업지역 일대에서 사할린과 캄참카 방면의 고기잡이배에 탈 노동자를 북한에서 모집하려고 했다.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은, 소련군이 일본인들을 만주와 시베리아로 끌고 간 것도 모자라

    남아 있는 일본인마저 ‘모집’이라는 허울로 다른 곳으로 보내려는 것이 아니냐며 불안해 했다.

     

    하지만 호구지책이 궁했던 일본인들은 굶어 죽느니 먹고살 수 있는 길을 택하게 되고

    그렇게 2천 여명이 캄차카의 고기잡이 일에 지원하게 된다.

     

     

    3. 귀환 후에 일본인들.

     

     

    ● 민폐 집단이라는 차가운 시선.

     

     

    1947년 1월 어느 겨울날.

    오사카에 사는 22세의 한 젊은 여성이 집에서 극약을 마신 채 자살했다.

     

     

    32C4E44A-5A71-490B-9B4B-FB537CA452E3

    < 당시의 기사 >

     

     

    다키카와 나쓰요라는 이 여성은 1945년 11월 조선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잠시 지낼 곳을 수소문하던 끝에 알게된 친척 집에서 온 가족이 신세를 지게 되었다.

    원래 이 집에는 미쓰이 씨 가족 5명이 살고 있었는데, 다키카와 가족 8명이 들어오는 바람에 졸지에 13명이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비좁은 집에서 함께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두 집 사이에 다툼이 잦았다.

     

     

    • “가뜩이나 패전으로 본토인들도 살기 빠듯한데, 사람들이 염치가 있어야지!”

     

     

    그도 그럴것이,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뜸 친척이랍시고 들어와 함께 살고 있으니,

    미쓰이 가족 입장에서도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군식구들은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마쓰이 가족에게 번번히 손을 벌리기 일쑤였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너무도 힘들었던 귀환자 가족 중 22세의 한 젊은 여성은 자살하고 만 것이다.

    당시 귀환자들을 대하는 본토인들의 일상적인 단편이었다.

     

     

    ● 임시 수용소의 삶.

     

     

    9253B2AC-CD5B-4B54-ABBA-DDF0EA21327F

    < 당시 수용소의 모습 >

     

     

    패전 후 2년여가 지난 1947년 겨울,

    도쿄의 역 부근에 설치된 귀환자 임시 수용소는 본의 아니게 거의 반영구 시설이 되어버렸다.

     

    당시 수용된 귀환자들은 일자리를 구해 빨리 밖으로 나가야만 다음 사람을 받을 수 있는데,

    수용소에 한번 들어오면 그대로 눌러앉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것이 취직은 어려운데 물가는 살인적이었다.

    나가더라도 높은 전세값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수용소는 시설이라고는 대충 지어진 가건물 속으로 바닥에 깔린 거적이 전부였다.

    게다가 귀환 출신의 어린이가 수용소 울타리 밖으로 나서기라도 하면,

    본토의 아이들은 이렇게 놀려댔다.

     

     

    • “외지에서 굴러 들어온 거지!”

     

     

    그때마다 아이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자며 울면서 돌아오는 턱에, 부모들의 억장은 무너졌다.

     

     

    ● 범죄자라는 오명.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도둑질을 일삼게 되었다.

     

     

    A6A27019-60B9-49DA-9BCC-BCF796482E52

    < 고구마를 사고 있는 전후의 일본인들 >

     

     

    1946년 7월 1일의 범죄 통계를 보면,

    생활고와 취직난으로 저지른 절도죄가 총 범죄 건수의 2/3를 차지했는데,

    범죄자의 대부분은 갓 제대한 군인이거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 ‘세균 덩어리’라는 인식.

     

     

    해외 귀환자는 더러운 전염병을 옮기는 세균 덩어리로 인식되고 있었다.

     

    1946년 봄에서 여름까지 중국대륙, 한반도의 일본인들이 대대적으로 일본으로 귀환하고 있었는데,

    이때 돌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일본은 각종 풍토병과 전염병에 시달리게 된다.

    때문에 흔히 외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본토인들로부터 ‘세균 덩어리’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당시 일본 언론의 보도다.

     

     

    • “조선, 만주에서 돌고 있는 전염병으로..”
    • “발진티푸스, 천연두, 콜레라, 페스트, 유행성출혈열 등이 있다.”
    • “본토인들이 귀환자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 “그보다 귀환자들을 만날 때에는 먼저 위생과 안전대책에 철저히 신경을 써야하겠다.”

     

     

    그동안 호의호식 했잖아!

    민폐 집단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범죄자, 거지, 세균 덩어리라는 인식은,

    귀환자들에게 한동안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귀환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이 있었으니,

    당시 귀환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귀환자들이 가장 힘들어 했던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 “본토 귀환 이래로 어떤 점이 가장 당신들을 힘들게 했는지?”

     

     

    라는 질문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 “너희들은 외지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온갖 호사를 누리고 살았으니, 지금은 천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이 가장 듣기 괴로웠다고 한다.

    .


 

답변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