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쭈리]근대 일본인들이 본 조선 : 모든 이들이 조선정벌을 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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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도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던 세계관.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화이사상(중국과 오랑캐)’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중엽,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이 새로운 중원의 주인공이 되자 중국을 중심으로 자리잡던 화이사상은 크게 변질되기 시작하여

     

     

    84B5CAE5-CBD3-4263-8616-A2979770BF38▲ 만주족

     

    저마다 자기 나라를 최고라 생각하기 시작한다.

     

     

    조선에서는 소중화사상이 나타나고

    “명나라도 없어진 판국에 이제 세계 문명의 중심은, 명나라를 가장 섬기고 따랐던 조선의 차지임.”

    베트남에서는 대남사상(소천하주의)가 나타났고 일본에서도 코쿠가꾸(국학)가 형성되었다.

    “만주족 촌뜨기들은 인정 못함. 우리가 쟤네들보다 뭐가 부족해서!”

     

     

    따라서 17세기~19세기 에도시대의 일본의 지식인들은 저마다 ‘국뽕’에 단단히 취해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형 화이질서’라는 ↓요런 체제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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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사키, 쓰시마, 사쓰마, 마츠마에 등 4곳의 창구를 통해 중국, 네덜란드, 조선, 류큐, 아이누(에조)와 각각 관계를 맺으며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관계는 겉으로는 대등했지만 일본인들의 속마음은 스스로를 황제국으로 생각하고 다른 국가들은 오랑캐로 간주하고 있었다.

    사실 에도막부 때 성행했던 조선통신사도 실제로는 대등하게 이뤄진 교류였지만,

    일본 내부에서는 조선의 사신단이 조공을 바치러 오는 것이라고 소문을 내고 있었으니,

    순진한 일본인들은 모두 그런가하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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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도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조선.

     

     

    에도시대 일본인들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먼저, 당시 조선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한사코 낮춰 봤다.

     

     

    • 김인겸 : “왜인들은 덕이 없고 예절을 모르는 개와 같은 오랑캐 족속들이다.”

     

     

    다만 통신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본이 발전된 나라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조선의 선비들에게 하찮은 재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성리학적 지식이 조선 > 일본 이라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조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

     

    왜 몰랐지? 당시 일본인들은 부산에 있는 왜관을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깐.

     

    다만 그들 또한 조선이라는 나라를 부정적인 이미지로 바라보고 있었다.

    17세기 후반, 사무라이 겸 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 아라이 하쿠세키 : 일본서기를 보면 고대 삼한은 일본에 사대를 하던 속국으로 나온다. 하지만 최근의 조선은 사람들이 교활하고 거짓말을 많이 한다.

     

     

    당시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조선을 속국, 조공국 정도로 생각하며 본인들에게 굽신거리는 나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다만 18세기 초 조선의 왜관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우고 최초의 한국어 교본까지 만들었던 아메노모리 호슈는 일본인들에게 이렇게 반박하기도 하였다.

     

     

    • 아메노모리 호슈 : 조선을 약한 나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이는 히데요시가 조선을 공격할 때, 많은 조선인이 살해 당했다고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오랜 평화가 계속되어 있었고, 이에 익숙해져 국방을 소홀히 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반면에 일본은 오랜 전란으로 전쟁에 단련된 정예 병사들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서 갑자기 일본이 선빵을 쳤으니, 조선은 초기에 허무하게 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상자 수는 일본이나 조선이나 비슷비슷했다. 특히 철군할 때는 일본군들은 꽤나 고생 좀 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 아메노모리 호슈 : 조선은 일본과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가까운 이웃일수록 잘 지내야 한다는 것은 공자님도 하신 말씀이다.

     

    ● 19세기 중엽 일본의 개항 : 일본인들의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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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에 의해 일본은 강제로 개항을 하게 되고 빠르게 서구 중심으로 재편된 국제질서를 인식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은 이렇게 세계를 3등분하고 있었다.

     

     

    1. 문명국 : 유럽과 미국
    2. 반미개국 : 일본, 중국, 조선, 태국, 페르시아, 터키
    3. 미개국

     

     

    그러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 일본의 지식인들 : 문명국은 미개국을 개척하고 정복하여 새로운 영토로 만들 권리를 가지고 있다. 또 문명국은 반미개국에게는 그들의 법을 무시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불평등조약을 강요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게 강제로 문호를 개방 하면서 일본이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전에 없던 애국심이 고취되어 존왕양이 운동(서양을 배척하고 천황을 받들자) 등이 대대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존왕파들의 생각은 이랬다.

     

     

    • 존왕파들 : 일본이 문명국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이 필요함!
    • 존왕파들 : 맞아. 그러자면 우리도 이웃한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해서 힘을 얻을 수 밖에 없음!

     

     

    그렇게 생각했던 대표적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 기도 다카요시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이었다.

     

     

    그는 1855년에 이렇게 말했다.

     

     

    • 요시다 쇼인 : 지금은 일본 사람들끼리 존왕파 vs 막부파로 나눠 싸우면 안된다. 이미 우리는 서양국가와 조약을 맺었는데 뭘 어쩌자고 싸우는 건가? 그보다 일본도 빨리 국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조선과 만주를 침략하여, 서양인들에게 잃은 이익을 만회해야 한다.

     

     

    1857년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했다.

     

     

    • 하시모토 사나이 : 지금은 일본이 독립할 수 있을지 없을지 중대한 갈림길에 있다. 일본이 살 길은 조선과 만주를 병합하고, 서양과는 친선을 유지하는 것 뿐이다.

     

    ● 서양에 맞서려면,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

     

    1861년 2월 러시아 군함이 쓰시마 섬에 나타나 승무원들이 상륙하여 저항하는 섬 주민을 살상하고 쓰시마 번주에게 면담을 강요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쓰시마 섬을 차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왜 쓰시마 섬이지? 쓰시마 섬은 일본, 조선(대륙)으로 가는 징검다리와도 같았으니, 알짜베기 요충지로 생각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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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영국이 개입하여 러시아 군함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 되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일본인들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일본인들은 쓰시마가 러시아한테 얻어 맞은 이유를 쓰시마 번의 힘이 약해서라고 결론을 내리는,

    동시에 그 원인을 조선에게 덮어씌우려고 했다.

     

     

    • 쓰시마 번이 최근 곤궁한 것은 조선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쓰시마와 무역을 하지 않았기 때문임.
    • 맞아. 그래서 최근 쓰시마 사람들은 먹을 쌀도, 입을 면포도 부족했다고 함.
    • 약속을 지키지 않는 조선을 이참에 정복해야함.
    • 그렇고 말고. 지금 때를 놓치면 러시아가 먼저 조선을 차지하게 될꺼임.
    • 걔네들이 왜 쓰시마를 노렸겠어?

     

     

    그러면서 일본의 정치인들은 쓰시마 번주에게 조선을 침공하는데 앞장을 서달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 쓰시마 번주 : 아니, 러시아한테 뺨 맞고 왜 조선에 화풀이 하려는 건데?

     

     

    결국 쓰시마 번주는 조선 침공에 동의하게 되었고,

    그러자 일본은 ‘정한(征韓 : 한반도를 정복)‘ 쪽으로 여론이 급속히 기울게 된다.

    다만 이럴 때 이에 반대하던 ‘극 소수’의 사람도 있었으니 가쓰 가이슈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 가쓰 가이슈 : 지금 아시아 국가들 중에 서구 열강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아무도 없다. 이럴 때 일본은 차라리 아시아 국가들과 손을 잡고, 무역을 일으키고 군사력을 키워야함. 그렇게 해야만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

     

     

    그의 주장은 구미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본, 조선, 중국 삼국이 이른바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말았다.

     

    ● 메이지정부의 개국과 봉칙 사건.

     

    기도 다카요시는 메이지 유신 정부의 중심 인물이다.

    그는 메이지 정부 출범 당시 대표적인 정한론자였다.

    그는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 기도 다카요시 : 서구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가 똘똘 뭉쳐야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 기도 다카요시 : 비록 우리(존왕파)가 승리하기는 했지만, 쇼군파 무사들은 정부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거든. 그들의 불만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조선을 침략해야 함.

     

     

    그러던 중 1868년 10월 에도막부가 막을 내리고 새롭게 메이지 정부가 성립하자,

    일본은 메이지 정부 수립 소식을 조선 정부에 전하고자 사신을 파견하게 된다.

    이때 기도 다카요시는 조선의 반응을 테스트 해보고자 했다.

     

     

    메이지 천황의 국서를 보내면서 의도적으로 조선의 국왕을 한단계 낮춰 황제가 제후국의 왕에게 명령한다는 ‘봉칙‘이라는 형식으로 국서를 보낸 것이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일본이 보낸 이 국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 흥선대원군 : 아니, 오만방자한 놈들 같으니라고 지들이 언제부터 우리의 상전이었다고.

     

     

    그러자 기도는 일련의 상황을 보고받고 이렇게 말했다.

     

     

    • 기도 다카요시 : 조선은 참으로 무례하다. 과거 막부의 쇼군들은 천황이 임명한 일본의 국왕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선 국왕은 그런 막부의 쇼군과 교류를 하고 있었으면서 이제와서 무슨 소리인가? 조선 국왕은 천황보다 아래 있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

     

    ● 전국으로 확산된 ‘정한론’.

     

    일본은 개국 이후 일본의 국력을 기르기 위해서, 또 무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조선을 점령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크게 대두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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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한론 논쟁

     

     

    그리고 10여년이 지나게 되면 ‘정한론‘ 전국적인 여론으로 대대적으로 확산되게 된다.

    당시 정한론 자체를 반대하던 일본인들은 아무도 없었어.헉!

    다만, 조선 침략의 방법을 두고 급진파와 점진파로 나뉘었을 뿐이지.

     

    당시 급진파들의 생각은 이랬다.

     

    C7FD9601-B998-423F-B246-886ADE5A5A0A▲ 사이고 다카모리

     

     

    • 사이고 다카모리 : 과거 쇼군파 무사들은 불만이 많다. 언제 다시 내란을 일으킬지 몰라. 그러니 지금 당장 그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조선을 쳐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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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와쿠라 사절단

     

     

    하지만 온건파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대부분 1871년 이와쿠라의 사절단 출신으로 서구 여러 국가를 직접 목격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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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이와쿠라 사절단들이 시찰한 국가들.

     

     

    그들은 혹시나 예전 무사 계급들이 조선 침략 전쟁으로 사기를 얻어 다시 세력을 회복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 오쿠보 도시미치 : 낡은 전통의 무사집단으로 대륙을 침략하자는 발생은 위험함.
    • 기도 다카요시 : 조금만 기다려. 우리가 유럽에 가서 배운게 많거든. 우리도 곧 근대적 군대를 갖게될 것임.

     

     

    그러면서도 불안해 했다.

     

     

    • 오쿠보 도시미치 : 만약 무사들이 예전 지위를 회복한다면 근대화에 악영향을 줄 뿐임.

     

     

    결국 당시 메이지 정부의 입장은 반드시 조선을 정복하겠지만 그 주체는 전통 무사가 아닌 근대화된 군대여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러자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 운요호 사건 : 조선 정벌의 첫단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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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5년 9월 일본은 다짜고짜 운요호라는 군함을 조선의 해안으로 띄웠다.

    먼저 부산에 갔다.

     

     

    • 조선인 : 니들 여기 왜 왔능교?
    • 이노우에 함장 : 조선 해안을 측량하기 위해 왔스무니다.

     

     

    이렇게 오리발을 내밀고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으로 북진했다.

    그리고 강화도에 도착했다.

     

     

    • 이노우에 함장 : 강화도는 한양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라능. 여기는 제대로 파악해 볼 필요가 있음.

     

     

    그렇게 해서 보트를 내리고 몰래 강화도를 탐색 하려고 했는데 그만 여기서 강화도를 경계하던 조선군에게 들통나게 되었고,

    조선군들은 이내 포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이에 놀란 일본군들은 황급히 보트를 타고 운요호로 도망쳤고,

    윤요호에 도착하자 일본군들은 대대적으로 대포를 발사하며 응수했다.

    그리고 영종도로 장소를 옮겨 이곳에서 조선 수군과 교전을 벌였으니,

    끝내 민간인 포함, 조선군 35명이 사살되고 16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때 일본군도 2명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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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상륙 도중 발을 삔 수병이 2명 있었다고.

     

    당시 일본은 근대식 화포로 무장했기 때문에 조선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들은 전리품으로 조선군 대포를 빼앗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메이지 정부는 적반하장 격으로 이렇게 항의했다.

     

     

    • 메이지 정부 : 조선측 발포가 점점 격렬해져서 어쩔 수 없이 운요호도 발포한거임.
    • 이노우에 함장 : 우리는 정당방위를 한 것밖에 없었음. 항해 도중에 땔감과 물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상륙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이웃 나라 배에 
      무턱대고 대포를 쏘아대다니. 조선 병사들은 도대체 도리를 모르는 자들이다.

     

    ● 강화도 조약 (1876년) : 식민지 수탈의 첫단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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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개월 뒤 일본은 함대 6척을 거느리고 강화도 해상에 나타났다.

    일본은 조선에 통상 조약을 강요했다.

    당시의 조약 내용을 보면,

    지난 20년 전 일본이 서양 열강으로부터 강요 받았던 내용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강요받은 것보다 더욱 가혹한 내용을 조선 측에 강요하고 있었다.

    재밌는 것은, 당시 일본은 서양에게는 예전에 체결된 조약 내용이

    불공정하다면서 다시 만들자고, 매번 우는 소리를 하고 있었으면서

    조선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불평등 조약‘을 만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일본의 전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서구 열강들보다 힘이 없어, 불평등 조약으로 고통을 받았으니, 자신들보다 더 열등한 조선을 통해 그 고통을 전가시키겠다는 의식이 강했어.

    헐! 완전히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분풀이 하는 격인데.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조선 땅에서 일본인들에게 치외법권 인정.
    2. 조선 정부는 일본 물품에 절대 관세를 부과할 수 없음.
    3. 조선 땅에서 일본 화폐를 사용할 수 있음.

     

     

    한마디로 남에 나라 땅에서 외국인들이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자기네 나라 돈을 사용하며, 맘껏 장사를 하겠다는 것이었지.

    너무 일본에게만 유리한 규정이잖아.

     

    그리고 이런 규정은 곧 자원의 수탈로 이어지게 됐다.

     

     

    왜 그런건데?

    후진국일수록 화폐의 가치는 낮게 취급되기 마련이지.

    그런데?

    당시 조선의 화폐(상평통보)가치는 일본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일본 상인들은 졸지에 헐값으로 조선에서 원자재들을 구입할 수가 있었음.

    그래서?

    그렇게해서 대량으로 쓸어갔던게 대표적으로 ‘쌀’이었는데, 그렇게 되자, 조선 내부에서는 극심한 쌀 부족과 가격 폭등을 가져오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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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의 쌀 수탈

     

     

    아!

    사실 임오군란(1882년)도 이런 원인에서 나타났던 사건이었음.

     

    ● 갑신정변 (1884년) : 친일 정권은 환영, 조선의 근대화는 반대하던 일본.

     

     

    한편 19세기 중엽, 일본의 개항으로 일본의 지식인들이 눈을 떴던 것처럼,

    19세기 후반 조선의 개항으로 조선의 지식인들도 눈을 뜨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옥균이었고,

    그는 일본이 이룬 근대화 성과에 감탄하며 조선의 개혁 모델로 삼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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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균 : 그만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조선의 독립 개화를 위한 대항세력으로 일본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자능.

     

     

    하지만 당시 조선의 정권을 쥐고 있던 민씨정권은 한사코 중국과의 전통적인 사대외교를 중시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대로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 민비 : 서양이나 일본 모두 음흉한 제국주의자들임. 그나마 청나라는 조선의 영토를 빼앗으려고 하지는 않잖아. 이럴 때 청나라의 도움이라도 받아야지 누가 우릴 진심으로 도와줄 수 있겠음?

     

     

    때문에 당시 조선의 정국은 개화파(친일)와 민씨정권(친청)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82년 개화파의 핵심인물, 김옥균이 사절단으로 일본에 가게된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일본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며 개혁에 필요한 자본 원조를 요청했다.

     

     

    • 김옥균 : 도와주셈.

     

     

    하지만 일본은 결코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건성으로 도와주는 척하면서 그를 이용해 조선에 ‘친일 정권’이 들어서기만을 바랐다.

     

    때문에 이후 조선의 개화파들은 일본 정부의 지원에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차가갑게 외면을 당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파멸만을 자초하게 된다.

    그 예로 1883년 차관교섭 사건을 들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의 국가 재정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민씨정권과 개화파는 재정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 묄렌도르프 : 돈을 찍자! 일본에 차관을 빌리자!

     

     

    하지만 일본은 결코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이로인해 큰 소리 쳤던 개화파 인사들은 줄줄이 조선 정부로부터 고립되었고 김옥균은 좌천당하기도 했다.

    이후 개화파들은 마음이 더욱 조급해지고 있었으니,

    심지어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하려는 쿠데타까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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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불전쟁 : 조공국이던 베트남을 돕겠다고 나섰던 청나라.

     

     

    1884년 때마침 청불전쟁이 터져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병사들이 절반 가량 철수하게 되자,

    이때 일본의 공사 다케조에는 김옥균을 이렇게 꼬드겼다.

    이때 일본의 공사 다케조에는 김옥균을 이렇게 꼬드겼다.

     

     

    • 다케조에 신이치로 : 청나라는 지금 망해가고 있스무니다. 당신들이 나라를 개혁하려 한다면 지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무니다. 우리 일본도 도와주겠음.

     

     

    이때 김옥균은 조금 어리벙벙했다.

    ‘차관 때는 꿔주지도 않던 일본이 왜 갑자기 호의적으로 변한 것이지?’

    어쨌든 김옥균은 쿠데타를 감행하게 되지만 청나라의 급한 수습으로 그들의 꿈은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의 스토리가 가관이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김옥균 일행은,

    일본 공사관 관원과 함께 인천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배에 탑승했는데,

    이때 조선 정부가 사절을 보내 김옥균 등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다케조에는 말했다.

     

     

    • 다케조에 신이치로 : 야, 너 내려!

     

     

    놀랍게도 일본인 공사는 김옥균 등에게 배에서 내리라고 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김옥균은 일본이 얼마나 야박한 나라였는지 실감하고

    그 자리에서 자살을 결의했지만

    다행히도,

    일본인 선장의 호의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겨우 일본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민씨정권 테러계획 (1885년) : 조선을 정치도구로 쓰려던 일본인들.

     

     

    일본은 정한론을 놓고 온건파 vs 급진파가 대립을 했고,

    온건파가 승리하자 급진파들은 대거 사직서를 내고 초야로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욕심은 끝나지 않았고 온건파의 독재를 빌미 삼아 이른바 자유민권운동을 단행하게 된다.

     

     

    • 급진파들 : 독재타도! 우리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달라!

     

     

    하지만 1885년 민권운동은 실패하여 궁지에 몰리게 된다.

    그러자 이들은 엉뚱한 상상을 하게된다.

     

     

    • 급진파들 : 일본인들에게 자극을 줘야함.
    • 급진파들 : 어떻게?
    • 급진파들 : 조선에서 민씨 정권을 타도하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성공해봐!
    • 급진파들 : 그러면?
    • 급진파들 : 조선에서도 민권운동이 승리했는데 일본에서는 왜 하지 못하냐면서 여기저기서 각성을 하고 나서겠지.
    • 급진파들 : 오! 기막힌 아이디어일세.

     

     

    그리하여 민권파들은 폭탄 200발을 만들 폭약을 준비하고,

    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들통이났고 끝내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주동자들은 재판을 받게되었으니, 당시 재판 기록은 이러했다.

     

     

    • 오이 켄타로 : 지금 일본인들은 너무도 고지식해서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사회의 진보를 바랄 수 없다. 사회 변화라는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대외침략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잘못인가? 이것이야말로 국민들에게 진정한 애국심을 일깨울 수 있는 방법 아닌가? 일본에서 혁명의 기회를 만들고자 저질렀던 일이다.
    • 오야 마사오 : 이렇게 해야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혁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도 변명했다.

     

     

    • 오이 켄타로/오야 마사오 : 조선이라는 나라는 전제정치로 고생하고 있어서 우리는 사해동포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그들을 돕고자 했던 것임.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착오가 있다.

     

    조선에서의 개혁이라면 주체가 응당 조선인이 되어야하지 않음?

    그렇지. 조선에서의 혁명을 돕고자 한다면 일본인이 왜 나서? 오지랖도 유분수지.

     

     

    ● 메이지 시대, 일본의 입지적 인물들이 본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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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에서 1만엔(최고 고액권) 지폐 인물이며

    니토베 이나조는 5천엔 지폐 인물이다.

     

     

    그들의 일본에서의 입지란,

    마치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이순신과 같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들 모두는 조선을 두고 당시 이런 말들을 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본 조선.

     

     

    1881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 후쿠자와 유키치 : 일본은 이제 동양 문명의 중심이 되었고 서양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일본 뿐이다. 그런데 지금 서양의 열강들이 동양으로 진출해 들어오고 있는 모습들을 보자. 마치 불이 집집마다 번져오르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 불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는 목조 가옥과도 같다. 따라서 우리는 무력으로 조선을 보호하고 문명국으로 인도해야 한다.

     

     

    또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 후쿠자와 유키치 : 일본은 더 이상 조선과 중국의 문명화를 기다려 아시아를 번영시킬 여유가 없다. 이제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서 다른 서양의 열강들과 똑같이 행동해야만 한다. 조선이나 중국을 대할 때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하게 대우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서양인들처럼 그들을 대하면 된다. 나쁜 친구(조선, 중국)와 친하게 지내면 주위의 비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일본은 나쁜 친구들과 하루 빨리 절교를 해야한다.

     

     

    니토베 이나조가 본 조선.

     

     

    • 니토베 이나조 : 조선인들은 정치적으로 무능력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으며 배우려고도 하지도 않는다. 이런 조선인들과 같은 나약한 마인드는 국가의 해악이고, 그런 국민들이 일본에도 있다면 사회의 큰 짐이 되고 만다. 일본은 조선이라는 죽어가는 나라를 부활시키기 위해, 하루 빨리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

     

     

    그런가하면 일본 제국의 총리를 지내기도 했던 이누카이 쓰요시는 이렇게 말했다.

     

     

    • 이누카이 쓰요시 :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약한 나라다. 그런 조선에 대해서조차,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세계에서 가장 비천한 조선에 대해서도 강경책을 쓰지 못하면서, 어떻게 서양에게 맞선단 말인가!

     

     

    이렇듯 당대 저명한 지식인들까지도 모두 정한론을 부르짓고 있었던 것이다.

     

     

    ● 한일합병 당시 일본인들은 어떠했나?

     

    결국 조선은 1910년 일본에 완전 합병된다.

    일본이 서구 열강에게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고 정한론을 부르짓더니 꼬박 반세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망한 나라’ 조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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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 월간 ‘사회신문‘에 수록된 ‘한일 병합과 우리들의 책임‘이라는 논설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수천 년 동안 확고한 독립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조선인에게 독립심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성적이고 의존적인 민족성 때문에 모래 위에 세운 기둥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동안 조선은 중국에 복속하고 일본에 머리를 조아리며 러시아에 달라붙었다. 도대체가 줏대 없는 역사 뿐이다. 때문에 오늘날 병합이라는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제국은 1300만명의 국민이 한꺼번에 늘어나게 됐다.

    (당시 일본은 1600만명이 넘었던 조선의 인구를 1300만명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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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 8월 30일 도쿄 아사이 신문을 보면 이런 광고 기사(한국어 교재 광고)가 있다.

     

     

    조선에 가라! 조선은 이미 외국이 아니다. 개간을 기다리는 옥토과 미지의 천연자원, 도처에 묻혀있는 국부는 뜻있는 일본인 제군들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조선은 닫혀있는 보물 창고다. 이제 보물 창고의 열쇠만 있으면 된다.

     

     

    그 열쇠란 바로 ‘한어대성‘과 ‘한어통‘이라는 책이다.

    지금 이 보물 창고의 보물들이 제군들께 제공되니 얼마든지 와서 가져갈 수 있다.

     

     

    참고 문헌 : 한국·일본 두 나라 역사 이야기(스즈끼 히데오, 요시이 아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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