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미래 – 두려움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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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두려움을 경계해야 한다...
여러 말을 차치하고,
사단은 분명히 두려움을 간직한 영의 존재다.
본래 두려움이란 어두움에 속한 것이고, 어두움은 내 육으로 하여금 자극을 쫓게한다.
그래서 사람은 자극을 받고 싶어하고, 자극적인 것,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 자극을 따른다.
다시 돌고 돌아서,
그 자극은 나로 하여금 어두움을 원하게 만들고, 그 어두움에 갇혀지길 원하게 한다.
이런 두려움, 그로인해 어두움에 갇히게 되는 현상이 반복되기 때문에,
내 영(혼)이 소멸하는 것이다...
내 영(혼)이 소멸하면 할수록,
창조자를 느끼길, 육신은 거부한다...
다시금 인류 역사의 서막을 살펴보자.
창3: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단이 간직한 본질적인 두려움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을줄 아는 두려움이다.
그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피하고자, 역설적이게도 온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거다.
온 인류가 예수를 저버리면, 또는 그로인해 다시오겠다는 그 약속을 예수가 지킬수 없게되면,
그러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피할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존재가 사단이다.
그래서 사단은 본질적으로 자기 정체가 들어남을 두려워한다.
자기 정체가 들어나면, 지옥의 정체도 반드시 들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단은 분명히, 자신이 창조자에게 버림받은 그 이유 그대로,
사람이 창조자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속였다.
두려움을 간직한 이 사단이란 존재는,
사람의 육신에 간직된 그 욕망을, 자아를, 스스로 창조자가 되고싶었던 죄악을 범하게 한다.
그 죄악을 범한 인류의 결과가 뭐냐.
창3: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두려움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결과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 자신의 진짜 아버지 앞에도 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육신이 원하는 지식? 지혜?가 이런 것이다...
육신은 사망을 향해 달려가려 힘쓰고,
육신은 그 육신의 지식과 지혜가 자신을 구원할 것처럼 속이지만,
실상 그 육신이 쫓는 지식과 지혜는 그 육신이 어두움을 사랑하는줄 알게 하는 것이다.
그 지식과 지혜는, 끊임없이 그 육신을 어두움으로 내 몬다.
그러면 창조자가 지혜와 지식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창2: 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문제는 그 쫓는 지식과 지혜의 근원이 어디냐 이다.
문제는 그 쫓는 지식과 지혜의 기준이 누구이냐 이다.
그리고 우리는, 창세기 3장 5절을 통해 그 답을 구할수 있다.
창3: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악을 아는 결과가 왜 두려움으로 변했을까...
다시 창세기 3장 7절을 살펴보자.
창3: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눈은 밝아졌는데, 눈이 밝아진 결과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는 육신의 눈을 말한다. 육신의 만족을 위한 지식과 지혜다...
이는 본질직으로 영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행위고,
밝아진 육신의 눈은 세상을 향하게 한다.
영의 시각, 영의 눈을 소멸시키는 행위다.
롬8: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결국 아담과 하와가 추구했던 그 지식과 지혜...
성경이 증거하길 선악을 알게하는 그 지식과 지혜...
눈이 밝아진 그 결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는,
어두움을 바라보게 하는,
창조자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지식과 지혜의 추구였다.
최소한...
그 쫓는 지식과 지혜에 관해서 다음을 경계해야 한다...
- 머리로, 육으로, 지식과 지혜로 하나님을 알려하는 어리석음.
- 머리로, 육으로, 지식과 지혜로 하나님을 판단해 보려는 어리석음.
- 창조자와 창조자가 허락한 성경이 기준이 아닌 지식과 지혜.
- 창조자와 창조자가 허락한 성경이 출발점이 아닌 지식과 지혜.
왜냐하면 이는 이미, 자신이 육신에게 사로잡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는 이미, 자신이 사단에게 사로잡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처서, 복종시켜야 한다...
설사 창조자의 존재에 관한 의구심이 생길 지라도...
설사 창조자의 주권하에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그 절대적 신뢰가 깨어졌을 지라도...
그 허망한 생각이 사단에게서 오는줄 알고,
육신을 처서 복종시키며,
마음과 뜻과 생각을 돌려야 한다...
오늘 내가, 들려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다가올 미래뿐 아니라,
사람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나아와 살아가면서,
두려움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생각의 기준을 바꿔봐...
창조자의 주권하에 있다는 절대적인 신뢰에서 출발해봐...
그게, 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고,
그게, 영의 일을 생각하는 거야...
두렵고, 또는 두렵지만,
영으로, 영의 일을 생각하며, 창조자의 주권하에 있다는 절대적 신뢰를 간직하는 방법이,
육신이 가져다 주는 그 두려움을, 사단의 최종적 무기인 육신에 심는 그 두려움을,
그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눅21: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육은 매일매일 거짓말을 하네요.
오늘도 저에게 이리 거짓말을 하더군요.
예수님은 전지전능하니...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아 ..이러더군요.
거짓말인 것을 알지만 순간 솔짓하게 하더군요.
그러다가 예수님이 누구가 생각하니 바로 풀리더군요.
예수님이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 즉 그분이 참이다라는 것..
그분이 나에게 자신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게 하시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냐 이리 생각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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