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브리핑(1950년-한국은 2018년-한국과 쌍둥이)


지만원의 시스템클럽(System Club) 펌.

 

나도 왠만해선 타인이 작성한 글을 퍼오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6.25 전쟁이 일어난지 정확히 68년… 하고 하루가 지난 오늘, 비가 뚝뚝 떨어지는 아침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발견한 지만원 박사의 “6.25 브리핑(1950년-2018년-한국과 쌍둥이)”란 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커서 소개하고자 한다. 


6.25의 아침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18만명의 인민군은 609문의 야포와 1,000여문의 박격포를 쏟아 부으면서 272대의 탱크를 몰고 파죽지세로 남침을 감행했다. 전선은 걷잡을 수 없이 밀리고 있는데도 국군은 연일 대승을 거두고 있다는 방송만 했다. 의정부가 유린됐을 27일 06시에야 비로소 한때나마 국군이 밀리고 있다는 방송을 했다. 놀란 150만 서울 시민들이 급히 짐을 꾸려 한강교로 몰렸다. 


한국방송 믿다 다 죽었다(6.25당시 방송국은 빨갱이가 장악)


그때 국군은 의정부를 다시 탈환했다며 또다시 승전보를 방송했다. 피난길을 떠나던 일부 시민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일부 시민들은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6.28일 새벽 2시15분, 어이없게도 한강교가 갑자기 폭파돼 버렸다. 다리를 메운 피난민과 국군들이 목숨을 잃었다. 포격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다가오자 집으로 돌아갔던 시민들이 한강으로 밀려와 아수라장을 이뤘다. 6.28일 오전 11시 30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이때까지 서울을 탈출하지 않았거나 못한 시민들 중 상당수가 북한군의 앞잡이가 되어 지도급 인사들을 학살했다. 개전 당시 98,000명이었던 국군은 6.28일 당시 불과 22,000명에 불과했다. 군이 사실을 사실대로 방송만 해주었어도 그리고 한강철교만 조기에 폭파하지 않았어도 수만 명의 지도급 인사와 시민들의 목숨을 절단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도연맹, 예전에는 북한을 추종했지만 새 사람이 되어 애국을 하겠다 맹세했던 빨갱이 전향자들이 인민군 세상이 되자 인민군 앞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당국은 서울 이외의 각 지역에서 보도연맹 가맹자들을 긴급하게 살해했다. 한번 빨갱이는 영원한 빨갱이였던 것이다. 지금 전향했다는 386주사파들 역시 진심으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카메레온처럼 목적상 전략상 전향한척 하는 것이라는 판단이 가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6.29일 06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관이 발 빠르게 C-54수송기를 타고 한강 남쪽 제방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군에 방어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6.30일 미24시단에 출동명령을 내려 인민군을 충주 이북에서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1일 부산에 도착한 16,000명의 미24사단은 7.22일까지 오산, 옥천 전투를 거치는 동안 8,000여명을 잃었다.


사단장인 딘소장은 중상을 입은 부하에게 물을 떠다주려다 절벽에 떨어져 36일간 민간인 집에 숨어 있다가 한국인의 밀고로 북한군에 포로가 됐다. 미25사단은 7월10-15일 사이에 부산항에 상륙하여 의성, 상주를 잇는 충청 및 경북 지역에서 북한군의 주공을 저지하다가 작전 6일 만에 3천여 명의 손실을 보았다.


7월18일 영일만에 상륙한 미1기병사단은 바로 그 영동지역에서 북한군 주력을 저지하기 위한 치열한 방어전을 폈다. 충북 남단 지역을 나란히 방어하고 있던 25시단과 1기병사단은 피란민 때문에 골치를 않았다. 임신부가 소형무전기를 숨기고 접근해와 북한군 관측장교 역할을 해주었고, 미군 보급차량이 갑자기 피난민들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했고, 피난민이 묻어놓은 지뢰에 피해를 입었기도 했다.


북한군은 미군을 공격하는데 피난민을 총알받이로 이용했고, 지뢰제거용으로 이용했다. 미군은 이들 피난민을 쏘아야 할지 실로 난처해했다는 기록도 있다. 임신부, 애기를 업은 엄마들로부터 총격을 받은 미군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때로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근리 비극은 이렇듯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문화의 일각일 뿐, 이제 와서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전에서 아들을 잃고 있을 때 한국군 장군들은 그렇질 못했고, 미군이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을 때 한국군은 대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쫒기고 만 있었다.


한국 정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UN안보리는 7월 7일 UN군 창설을 결정했고, 7월 8일 맥아더 원수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어린 한국군의 지휘를 부탁했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킬링필드의 제물이 됐을 것이다. 노근리 비극은 이러한 큰 그림 속의 하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노블리스 오블리주

 

미합중국은 한국전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귀중한 목숨을 바친 전사자들에게 이런 비문을 바쳤다.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면부지의 나라,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들을,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기꺼이 나선 아들과 딸들에게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제24사단장인 딘 소장이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86kg의 체중이 2개월 만에 58kg가 되었다. 밴프리트 장군이 아들을 잃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들을 바쳤고, 클라크 UN사령관도 아들을 바쳤다. 워커 중장이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군번 1번 이형근 대장이 회고하는 6.25

 

군번 1번의 외길 인생 이형근 회고록”(중앙일보사) 제55족-57쪽에 군수뇌부에 숨어있는 간첩을 의심하는 10대 불가사이가 기록돼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6.25전쟁 전후에 나타난 10대 불가사이를 지적함으로써 향후 국가방위를 위한 교훈으로 삼고 싶다. 그것은 군사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나는 6.25 초전의 전후 사정을 종합 판단할 때 군 내외에서 좌익분자들이 긴밀하게 합작, 국군의 작전을 오도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면 통적(通敵) 분자가 과연 누구냐?  나로서는 수상하다고 느껴온 사람이 있지만 심증만 갖고 꼭 집어 거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들 가운데는 죽은 사람도 있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누군가가 확증을 제시할 것으로 믿으며 바로 이런 증언이야말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긴요한 일이라 믿는다. 풀려야 할 가칭 10대 미스터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선 부대의 적정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이다.

둘째,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장급의 대대적인 교류와 이동이 단행되었다. 모두가 지형과 병사에 익숙 치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셋째,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다. 6.13-6.20일에 걸친 전후방부대 이동 역시 가장 부적절한 조치였다.

넷째, 북 6.11부터 발령됐던 비상경계령이 6.24일 0시에 해제됐다.

다섯째, 이런 위기 상황에서 육본은 비상경계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1(50%)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다.

여섯째, 육군 장교클럽 댄스 파티다. 장교들은 6.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다.

일곱째, 적의 남침 직후 우리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 투입해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여덟째, 적의 공세로 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6.25-27일 우리 방송은 국군이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아홉째, 한강의 조기 폭파다. 병력과 군수물자가 한강 이북에 있는데도 서둘러 폭파했다.

열번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집행이다. 최대령은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 폭파했을 뿐인데 이에 책임을 지고 1950.9.21일 비밀리에 처형됐다.

 

일본 전사에 쓰인 영동 지역 전투와 노근리 


2002. 2. 2일 우리 언론은 BBC 방송을 인용하여 당시의 미군을 무자비한 살인집단으로 매도했다. 주한미군 철수, 반미감정, 염군사상, 병역의 양심적 기피 등 김정일 전략을 대행해주는 세력들이있다. 1950년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학살당하고 짓밟힌 역사에서 벗어난 지 불과 5년이었다. 당하고, 죽고, 짓밟히던 민족이었다. 여순-순천, 4.3 사태 등을 위시하여 동족 간에 집단 살인 행위들이 있었다. 6.25때에는 북괴군에 의해 엄청난 애국지사들이 살육당했다.


미군은 한국전에서 56,000여명의 생명을 잃었고, 11만 5천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우리의 목숨이 중요한 만큼 미군의 목숨도 중요하다. 양민을 죽였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양민을 가장한 게릴라, 북한에 의해 방패로 사용 당하고 있는 양민들로부터 지극히 다급했던 미군이 얼마나 당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정황도 살펴야 한다.


나는 월남전에서 42개월간 전투를 했다. 내 부하가 죽으면 눈이 뒤집힌다. 월남 도지사나 군수의 허가를 받아 마을을 통 채로 불바다로 만든 적도 있다. 이는 1970년대 초의 일이다. 아마도 내가 1950년에 남의 나라에 가서 미군이 당했던 일을 당했다면 나 역시 통제 지역을 벗어난 민간인들을 적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미군을 무조건 두둔하자는 게 아니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입장을 바꿔 스스로에게 “나 같으면 어찌 했을까“를 먼저 물어봐야 한다. 


일본이 쓴 6.25전사 요약


일본이 본 “한국전쟁”이 전집 10권으로 구성돼 있다. “日本陸戰史硏究普及會” 발행. 그 중의 일부를 발췌한다. 


  • 1950년3월초, 1주일간 29회의 공비습격이 있었고 38선 부근에서 18회의 분쟁이 있었다(p.37).
  • 3월위기설이 있었다. 북괴가 곧 남침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북괴군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정보가 입수됐다(p.38).
  • 5.11일, 이대통령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북괴군의 남침이 임박해 있다. 미국의 원조가 부족하다. 그래서 5.6월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p.38).
  • 북괴군은 18만4천 명, 야포 609문, 전차 272대, 전투기 168대였고, 한국군은 병력 9만8천, 야포 91문, 훈련기 10대였다(p 38-39).
  • 6.9일, 채병덕 참모총장은 연대장과 사단장에 대한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이는 5.17일 국방차관으로 취임한 장경근의 입김이라는 설이 있다. 전방 사단장으로 임명된 장군들은 부대를 장악하고 지형을 익숙시킬 여유 없이 전쟁을 맞았다(p.40).
  • 6.24일(토요일), 육군장교클럽(구락부) 개관 축하연회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서울번화가에서는 1사단(백선엽 대령, 개성포진) 및 7사단(유재흥 준장, 의정부 포진) 장병들과 연회에 참석했던 장병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각 사단에는 “내일은 좋은 날이니까 규정 외의 외출 외박을 허가해도 좋다”는 전문이 있었기 때문에 춘천에 포진한 6사단(김종오 대령, 춘천 포진)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장병들을 내보냈다(p.44).
  • 육본은 6.25 0시를 기해 비상경계령을 갑자기 해제하고 전 장병의 2분의1에게 휴가를 주었다 (이형근 회고록).
  • 6.25 남침 사실을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채병덕에게 보고하자 전속부관은 주무시는 총장님을 깨울 수 없다며 끝내 알리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그런 부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지 않은 채병덕 장군도 수상했다. 수많은 예비역 장군들이 채병덕 장군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참전 장군들 증언).
  • 6.28일 0시 15분에 의혹의 미스터리 한강철교가 폭파됐다. 폭파경위는 다음과 같다. 한강교는 한강의 유일한 교량이었다. 미 군사고문단과 채병덕 참모총장 사이에는 “적의 전차가 한강교 근처에 접근한 것을 채병덕 장군이 확인했을 때 폭파한다”는 약속이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이 약속이 갑자기 깨졌다. 주 병력이 아직 강북에 있고, 모든 무기가 강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 고문단 부참모장인 그린윗드 중령에게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한국군이 한강교를 폭파한다는 것이다. 그린윗드 중령이 육본으로 달려갔다. 김백일 참모 부장의 말이 “국방차관 장경근 장군이 01시 30분에 폭파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지금 곧 폭파해야 한다. 그러는 사이에 제2사단장 이형근 장군이 와서 제2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아직 시내에 있으니 폭파를 연기해달라고 건의했다. 김백일 장군이 이를 받아들여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에게 폭파중지를 명했다. 장창국 대령이 짚차로 달려갔지만 도로가 피난민으로 채워져 있어 시간이 지연됐다. 28일 02시15분, 드디어 한강교 위에 3열로 뻗은 인파와 차량이 2회의 섬광이 번쩍 하는 사이에 희생됐다. 주력부대인 2,3,5,7 및 수도 사단이 서울 외곽에 있었다(p.87-89).
  • 6.28일 11시30분, 서울이 함락됐다. 한국군은 퇴로가 차단된 사실도 모르고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목숨을 건 채 사우고 있었다(p.89).
  • 한강교 폭파 명령을 누가 내렸는가에 대한 군법회의가 열렸다. 채병덕 장군은 “군사지식이 있는 자가 그런 명령을 내릴 리 없다”고 증언했고, 국방차관 장경근은 “나는 명령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결국 공병감인 최창식 대령이 스위치를 누른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 결과 최창식 대령만 1950년 9.21일 부산교외에서 총살 집행되었다(p.91).
  • 인민군이 입성하자 서울시에는 적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인파가 의외로 많았다(p.91).
  • 6.29일 0600시, 맥아더 원수가 그의 전용기 바탄호(C-54)가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정상 조직을 갖춘 한국군이 불과 2만2천명, 피난민과 섞여 뿔뿔이 철수해오는 병사들을 보고 파병을 결심했다(p.115).
  • 6.30일 04:57분, 트루먼 대통령이 맥가더의 건의를 받아들여 2개 사단과 1개 전투연대 파견을 전 세계에 공표했다(p.117).
  • 미군 충원병의 70%는 19-20세였다(p.118).
  • 6.30일, 맥아더 원수는 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제24, 제25시단의 출동을 전화로 명했다(p.128).
  • 6.30일 밤,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24사단에게 전화로 한국 출동명령을 내렸다(p.130).
  • 7.1일 03시, 비가 쏟아지는 구마모도를 출발, 08:05분에 이다쓰게에 도착했다(p.131).
  • 7.1일 08:45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4대의 C-54기에 탑승하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안개가 짙어 내릴 수 없었다. 10회나 회항하다가 15:00시에 겨우 착륙했다. 이들은 열차에 탑승하여 한국 국민의 환호를 받으면서 부산을 출발하여 7.2일 08:00시에 대전에 도착했다(스미스 중령 지휘)(p.132).
  • 7.8-15간 제 25사단이 부산에 속속 들어왔다(p.193).
  • 7.14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군 지휘를 UN군 사령관에게 위임했다(p.195).
  • 24 사단은 15,965명 중 1주일간의 지연작전에 4,525명을 잃었다. 이어서 오산-옥천 전투를 치르기까지 17일간의 전투에서 7,305명의 병력과 장비의 60%를 잃었다(P.237).
  • 24사단장 딘 소장은 부상병이 요구하는 물을 뜨러 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어깨, 늑골, 머리에 부상을 입고 금산 지역을 헤매다가 자신을 도와주던 한국청년의 밀고로 36일째가 되던 8.25. 북괴에 포로가 됐다. 평소 체중은 86kg이었으나 체포됐을 대의 체중은 58kg이었다. 그는 3년간의 포로생활을 하다가 1953년9월4일 판문점으로 돌아왔다(p.239).
  • 당시 많은 피난민이 영동으로 몰려들었다가 다시 황간- 대구로 남하하고 있었는데, 북괴군과 게릴라들이 그 속에 끼어서 사단 陣內로 들어왔다. 한 임산부의 모양이 수상하여 조사해 보니, 소형 무전기를 숨기고 있었다. 그녀는 미군의 포병 위치와 북괴군의 射彈을 조종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짐 속에는 경화기가 숨겨져 있었고, 쌀을 운반하는 바구니 속에는 박격포 탄약이 들어 있었다. 또한 미군 보초가 갑자기 피난민으로부터 사격을 받기도 했고, 지뢰탐지기에 의해 총기를 발각당한 무리들로부터 습격을 받는 등 그야말로 마음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보급차량도 종종 습격을 당했고, 도로에는 지뢰가 매설돼 있었으며, 불시에 미군 포병이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p.252).
  • 영동의 7.26일 날이 밝아올 무렵, 먼저 수 백 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횡대로 늘어서서 전진해 왔다. 그 후방에는 전채 4대와 약간의 보병이 뒤따르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진지로 접근해 왔을 때, 지뢰가 폭발하자 주위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차와 보병이 용서 없이 피난민을 사살했다. 피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대오를 정리하고 전진을 다시 계속했는데 지뢰는 또다시 폭발했다. 사실은 북괴군이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피난민들을 앞세워 희생시키는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병사단은 피난민을 사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뢰지대를 통과시킬 수도 없는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이었다(p.254-255).
 

전교조, 강정구 등이 주장하는 6.25


아래는 전교조의 통일교육 지침서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의 일부다.


해마다 6.25가 되면 한국전쟁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전교조 교사들은 매우 당혹스럽다(p.25). 북은 북침이라고 주장하고 일각에서는 미국의 남침 유도설을 제기한다.

 

강정구 교수는 전쟁의 원인을 단독정부를 수립한 남한에 있으며 4.3항쟁, 여수항쟁 등 인민 항쟁, 각지의 유격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작은 전쟁’이 진행됐고, 이것이 확대되어 6.25로 이어졌다고 한다(p.16-27)”. 인용된 강정구 교수의 주장은 전쟁의 원인이 남한 정부에 있다는 말이며 ‘작은 전쟁’과 6.25는 다 같이 외세에 의한 민족 분단을 극복하려는 정당한 전쟁들이었다는 뜻이다.


북침“, “미국의 남침 유도설“, “민족해방을 위한 정당한 전쟁“이라는 설에 심정적 무게를 두기 때문에 한국전쟁이 북의 남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교과서 내용을 학생들에게 교육하기가 당혹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교조는 남침설을 피해간다남침이냐 아니냐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분단의 역사적 교훈에 초점을 맞추라고 강론한다(p.16). 분단의 역사적 교훈은 분단이 외세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운 친일파에 의해 야기됐다는 것이다(p.26). 통일을 방해한 외세는 미국이라는 것이다.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던 그게 무슨 상관이냐, 그런 것은 따지지 말자. 단지 중요한 것은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며 그 전쟁의 원흉은 바로 미국과 친미-냉전 세력임을 교 육하라”(p.26).

 

북한군을 친근한 친구로 부각시키고 북한을 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론한다. 통일은 전교조의 목표이며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을 미국과 남한 내의 냉전-기득권 세력으로 규정한다. 결국 전교조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 내 기득권 세력과 미국이라는 결론이다. 책에 클로즈업돼 있듯이 인민군과 어깨를 같이 하여 남한의 기득권 세력을 타도하고 미군을 몰아내는 투쟁을 해야만 통일이 온다는 것이다. 


“우리말을 북한에서 되찾자. 6학년 국어과에 한글에 대한 단원이 있다. 이를 이용하여 남한 말고 북한 말이 어떻게 다른지 조사해오라고 했다. 도화지는 그림종이, 운동화는 헝겁신, 구석구석은 고삿고삿, 전기밥솥은 전기밥가마, 기가 막히다는 억이 막히다 등 등 60개를 조사해 왔다. 북한은 우리말을 보존한 반면 남한은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면서 우리말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아이들에게 간판을 조사해 오라고 했다. 한글로 된 간판은 겨우 15.5%였다(p.195-196)”.

 

민족적 정통성이 북한에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인 것이다. 2018.6.24.

지만원

http://www.systemclub.co.kr

6.25 브리핑(1950년-한국은 2018년-한국과 쌍둥이)    



-잼-                

Share This Post
Written by jamnetkr
운영자(Jamnet)과 동일인. 43Gear.com 운영자이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블로거(Blogger)임. B형. 사수자리. 10PING ID: jamnet@naver.com >> 10PING 추천인에 입력. 고고.
이 블로그 포스트에 투표해 주세요.
0 0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You may use these HTML tags and attributes: <a href="" title=""> <abbr title=""> <acronym title=""> <b> <blockquote cite=""> <cite> <code> <del datetime=""> <em> <i> <q cite=""> <s> <strike> <strong>